POENITENTIA

[필레인x로간] 고해

1



Poenitentia
write by UNUS


밀레시안.

밀레시안이라 함은 통상적으로 늙지도, 죽지도 않는 불사자를 의미한다. 그 짧은 단어에 담긴 ‘별에서 온 여행자’라는 뜻은 거의 잊혀진 수준이다. 에린의 원주민들-다난, 엘프, 자이언트 그리고 포워르-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한 순간에 세상에서 뚝 떨어진, 인류의 형태를 완벽하게 모방한 외계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밀레시안은 에린에서 가장 이질적인 특이점이다. 그들은 에린의 주인도, 지배자도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각자가 에린의 분기점이 될 수 있었다. 마치 다 읽은 책을 다시 펼치듯 원하는 때, 원하는 순간, 원하는 시간, 원하는 공간에서 눈을 뜨는 것이 가능했다. 심지어는 몇번이고 고치고 바꾸어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과거를 어느정도까지는 고쳐쓰기까지 할 수 있다. 인간이라면, 생을 후회하는 자라면 누구든 갈구할법한 지고한 능력이었으나 밀레시안은 그것에 매몰되지 않았다.

밀레시안이라는 종()이 가진 개념과 이성의 차이인가. 아니면 단순한 심상의 차이인가. 지나버린 과거따위에는 발목을 잡히지 않을 정도로 무한한 존재이기 때문인가. 그 이유를 고찰하고자 한다면 끝이 없으리라.

높고 푸르른 하늘 아래, 암탉을 노리는 여우를 쫓아내는 어린아이와 풀을 뜯는 양을 지키는 목양견이 볼거리의 전부인 시골마을 티르 코네일의 풍경이 한적하다. 하늘의 구름이 저 멀리에서 모여들고 공기중에 물냄새가 난다. 밤이 깊어지면 비가 올 듯 했다. 필레인은 허리춤에 묶인 허브뭉치를 풀고 말에서 내렸다. 순백의 군마는 주인이 내리자 작게 고개를 털더니 앞발굽으로 땅을 툭툭 찼다. 필레인의 큰 손이 놈의 목덜미를 투박하게 두드려 진정시키자 방문자의 소리를 들은 것인지 언덕 위 오두막의 문이 열렸다.

“자네.”

“오래간만입니다, 어르신.”

던컨은 그 나이치고 굽지 않은 허리에 뒷짐을 지은 채 낡은 나무 바닥 위를 걸었다. 조금 삭은 듯 끼긱거리는 소리가 났다. 필레인은 곧장 허리에 묶어둔 허브 뭉치를 꺼내들었다. 티르 코네일의 촌장, 던컨이 아직 정정하다고는 하나 노인은 노인이었다. 이렇듯 주기적으로 약을 챙길 정도라면 몸이 불편하기는 하다는 말이다. 종이로 잘 포장된 허브뭉치를 건네받은 던컨은 만족스러운 듯 미미하게 미소지었다.

“자네가 가져올 줄은 몰랐는데……. 오랜만에 얼굴을 보니 반갑네.”

“목소리가 많이 잠기셨군요. 감기입니까?”

“이 나이가 되면 조금만 시린 바람에도 고생하기 마련이지.”

크흠, 짧게 기침하는 소리에 필레인은 묘하게 기분이 가라앉았다. 인간이 태어나 성장하고 살아가며 늙어가다가 죽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필레인은 주변인이라 할만한 이들의 삶과 죽음을 셀 수 없이 지켜봐왔다. 굳이 셈하거나 기억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아주 많이, 정말 많이 봐왔다. 던컨의 노환이나 병은 자연스러운 일이건만 필레인은 그 모습을 보며 아주 잠깐이지만 부럽다고 생각했다.

“온 김에 차라도 한 잔 하고 가겠나?”

“저는…….”

“그리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자, 들어오게. 앞서 걷는 던컨의 뒤를 필레인은 말 없이 바라보다가 따라 들어갔다. 낡고 고즈넉한 오두막집의 횃대 위에는 통통한 푸른 새 한 마리가 둥지에 앉아 깊게 잠들어 있었다. 저 새만이 필레인이 처음 에린에 왔을 때와 한 치도 달라지지 않은 유일한 풍경일 터다. 필레인은 열린 문을 통해 오두막 안으로 들어간 뒤 문을 닫았다. 노인 혼자 사는 집 특유의 냄새와 아늑한 분위기에 필레인은 이상하게도 고향에 온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의 고향은 이미 수천년 전 저물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이상한 느낌이었다.

던컨은 발치에 치대는 노란 털을 가진 고양이를 밟지 않기 위해 어기적 걸었다. 고양이를 피해 벽난로에 도착한 노인은 주전자에 물을 담아 불 위에 올려두었다. 필레인이 배송해 준 포장을 뜯은 던컨은 잘 말려 묶은 허브 잎사귀들을 나무잔에 담고 꿀에 절인 레몬을 한숟갈씩 퍼넣었다. 노인이 조용히 제 일을 하는 동안 필레인은 익숙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담요와 쿠션이 놓여진 것은 던컨의 흔들의자였다. 그 곁에 놓여진 낡은 나무의자는 던컨을 찾아온 손님들이 종종 앉던 것으로, 필레인도 몇번 앉았던 기억이 있었다.

“자, 받게나. 레몬이 들어간 허브차라네.”

“감사합니다.”

그 사이 끓은 물로 차를 만든 던컨이 부르자 필레인은 냉큼 노인에게 다가가 잔을 들었다. 던컨의 거동이 불편하지 않게 잔 두개를 모두 챙긴 필레인은 흔들의자와 낡은 의자가 있는 자리로 갔다. 노란 고양이는 던컨을 충분히 귀찮게 했다는 듯 이제는 필레인의 발치에서 비비적댔다. 걸음에 방해가 되는 고양이를 성큼성큼 피해 걸은 필레인은 흔들의자와 낡은 의자 사이에 놓여진 협탁에 잔을 내려놓았다.

필레인을 따라 의자에 간 던컨은 의자의 담요를 걷어내고 엉덩이를 붙였다. 무릎에 담요를 덮기 무섭게 노란 고양이는 냉큼 노인의 무릎 위로 올랐다. 던컨은 이눔의 고양이가, 하며 투덜거렸지만 고양이를 쫓아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예뻐하듯 등을 쓸어만져주니 작은 털덩어리는 골골골 소리를 내기 바빴다. 필레인은 그 작고 어린 생명체를 쓰다듬는 노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삶을 고뇌하지도 죽음을 갈구하지도 않는 무구한 생명체는 그저 노인의 손길 아래에서 기분좋게 몸을 뒤집었다.

“자네는 여전하구먼.”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러워 마지않는 눈 말일세.”

던컨의 말에 필레인은 마치 급습을 당한 듯 했다.

“여우에게 물려가는 닭이나 늑대에게 쫓기는 양, 양치기 개에게 물려 다친 늑대를 보고 사람은 연민을 느끼는 법이네. 내가 아닌 것의 죽음에도 공감하는 것이 사람이니까. 하지만 자네는 처음부터 달랐지. 죽어가는 것을 부러워하다니 말이야.”

“…….”

“자네가 많은 일들을 겪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만큼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네. 누구든지 변화를 겪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지. 누군가는 자네가 겪은 것의 반… 아니, 반의 반절만 겪더라도 인생이 격변했다고 말할걸세.”

던컨은 고양이를 만지던 손을 거두고 협탁의 나무컵을 들어 아직 식지 않은 차로 입을 축였다.

“그럼에도 자네는 여전하구먼.”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지 못하고, 그저 텅 비어버린 자. 필레인은 아득하게마저 느껴지는 그 모든 일을 겪고도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저 평화로이 늙어 죽음만을 기다리는 노인을 부러워하는 불멸자. 필레인의 본질을 그토록 잘 표현할 수 있는 모순이 또 어디에 있을까.

필레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제 손을 내려보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억지로 꾹 쥐었다. 장갑의 가죽이 짓눌리는 소리가 미약하게 새어나왔다. 던컨의 무릎 위에 몸을 뒹굴고 있던 고양이는 불편한 분위기가 내키지 않는지 왜앵, 소리를 내더니 노인의 무릎에서 내려갔다. 벽난로 앞의 따듯한 자리에서 몸을 뒹구는 작은 생명체의 가르랑거리는 소리와 뗄감이 타는 소리만이 긴장된 공기를 흐트러트렸다.

던컨은 아무 말도 잇지 못하고 그저 입을 꾹 다문 여행자를 바라보았다.

“자네를 탓하고자 함은 아니라네.”

“……알고 있습니다.”

필레인은 목 메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정말로 제 탓이 아니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끊어지지 않고 영원히 이어지는 삶을 살다보면, 그 울분과 슬픔을 받을 자가 존재치 않게 되면, 인간은 끝내 자기 자신을 원망하는 선택을 하고 만다. 필레인은 원망의 화살을 신에게 돌렸으나 그가 가진 모든 울분과 분노가 신을 향하지는 못했다.

“던컨.”

음? 노인은 차가 담긴 나무잔을 든 채로 필레인의 부름에 반응을 보였다.

“저는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는 한, 변하지 않을겁니다.”

필레인의 고해(告解)에 던컨은 잠시 눈을 크게 뜨더니 잔을 내려놓았다. 달그락, 협탁 위의 잔이 가벼운 소리를 내었다.

“정말 그리 생각하는가?”

“……예.”

“하지만 자네는 많이 변했네.”

아까와는 다른 말이었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이제와서 다른 말이라니. 필레인이 무어라 말을 잇기도 전에 던컨은 말했다.

“예전의 자네였다면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을걸세.”

“…….”

“그저 막연히 죽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자네는 내 말에 분을 참을 이유가 없다네. 그저 긍정하면 그만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아는 척 하지 말라고 쏘아붙여도 무방하고. 그리해도 내가 할 말은 많이 없을걸세. 그저 늙은이의 오지랖이었다며 너스레나 떨고 사과나 하지 않겠는가.”

던컨의 말에 필레인은 무슨 표정을 지어야할지 모르는 듯 했다. 그 사이 창밖으로 빗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던컨은 마치 폭풍우 치는 세상 속에서 길 잃은 청년을 거두어들여, 잠시 쉬는 동안 앞길을 조언하는 인자한 노인처럼 다정한 낯으로 웃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 어디있겠는가. 저 끝없이 얼어붙은 시드스넷타의 얼음도 한때는 녹고, 영원할 것 같은 태산도 조금씩은 깎여간다네. 신이 영원하다 할지언정 신의 시대는 저물었고 인간의 시대도 언젠가는 끝을 맞이할게야. 그러니 자네 또한 변할걸세. 변하고 있는 중일게고.”

“…….”

‘이런, 난로가 꺼질 것 같구먼.’ 일부러 말을 돌리는 던컨의 인자한 목소리에서 필레인은 이상하게도 그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생각이 깊고 다정했던 아버지. 어린 필레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며 삶을 가르쳐주던……. 던컨은 그의 슬하에 자식이 없었으나 거두어 키운 아이가 있었고, 자식처럼 여정을 지켜봐온 수 많은 밀레시안들이 있기 때문인지 종종 수천년을 살아온 필레인조차 말이 막히는 관록을 보이곤 했다.

노인이 의자에서 일어나 벽난로 옆에 둔 장작더미로 다가갔다. 노쇠한 손이 마른 나무장작을 들어올리는 소리가 났다. 느린 손길로 던져넣은 장작에 불이 옮겨붙도록 부지깽이가 은은한 불길을 뒤적였다. 나무벽 한겹 너머로 들려오는 빗소리와 오래된 나무의 삐걱거림이 발치에서 울렸다. 필레인은 아득한 향수를 느꼈다. 수 천년 전, 이 땅이 아닌 저 먼 세상의,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고즈넉하고도 잔잔한 감각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그는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것이 변했다.

“저는… 제가 무엇이 변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필레인은 아무런 실감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죽고 싶을 뿐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은 채 시간에 풍화되어 사라질 수 있으면 족했다. 더이상 그 누구도 기억하지 않게 된, 그리하여 필레인조차 그저 기억으로만 되뇌이게 되어버린 아내의 기억을 안고 죽음에 안기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의 갈망은 에린에서의 시간으로도 무뎌지지 않았다. 단 한순간도 잊지 못하는 열망을 안고 그는 저주스럽게 살았다.

그로 인해, 필레인은 제 어리디 어린 연인-연인이라니, 이 말조차 낯설어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을 무수히 상처입혔다. 오늘도, 어제도, 가까운 언젠가에도 분명히 상처입혔을 것이다. 사과와 후회, 수습의 반복이 무의미한 쳇바퀴처럼 구르고 또 굴렀다. 그러다 견디지 못한 연인의 말로를 보았다. 필레인은 그 안에서 깨달음과 후회를 느꼈을 것이나 그럼에도 극적으로 변하지는 못했다. 그저 더 안으로 깊게 본심을 숨기는 법을 익힐 따름이었다.

던컨은 부지깽이를 제자리에 걸어두고 몸을 돌렸다.

그저 애처롭기 그지 없는 낯의 청년을 두고 노인은 홀로 말했다.

“바람이 돌을 깎는다 하여 돌이 제 변화를 아는 법은 아니라네.”

필레인은 마치 청년 시절로 돌아간 듯 했다.

아니, 아니다.

필레인은 여전히 서른이었다.

수천년이 흘렀음에도,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을 견뎠어도, 정상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고, 모진 시간들을 견뎌왔음에도 그는 여전히.

고작 서른살에 불과했다.

누군가는 어른의 나이라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한창이라고 할 것이며, 누군가는 아직 어리다고 할 나이. 던컨은 그저 필레인을 서른의 청년으로 그를 받아들일 따름이었다. 필레인은 그것이 너무나 낯설었다. 너무나 낯설어서, 목이 메였다.

“제가 옳게…… 바르게 변할 수 있겠습니까?”

던컨은 필레인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알았다. 노인은 허허, 너털웃음 소리를 내었다.

“영웅답지 않은 질문이구먼.”

던컨은 잠시 목을 가다듬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잔잔하게 내리는 빗줄기가 시릴 듯 했다.

“옳고 바른 것이 중요한 게 아님은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사람은 그저 제가 뜻하는 바를 정직하게 나아갈 뿐이네. 더이상 나아가지 못할 때에 이르러서야, 사람은 그제야 제 삶을 돌아볼 수 있게 되는게야.”



처마 위로 빗물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필레인은 감았던 눈을 느리게 떴다. 책만 두었을 무릎 위는 두툼한 담요 하나가 덮여있었다. 잠시 졸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깊게 잠들어버린 모양이다. 필레인은 콧등 위에 걸린 안경을 벗어 책이 덮인 협탁 위로 올려두었다. 등받이에 몸을 깊게 묻은 그는 고개마저 젖힌 채 깊은 한숨을 뱉었다.

기분나쁜 꿈은 아니었다. 유쾌함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그런 꿈이었다.

필레인은 마른 세수를 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빗소리가 잔잔하게 느껴졌다. 가까이 다가오는 인기척에 손을 걷어내자 크림색을 머금은 고수머리가 보였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갈색의 눈은 애정과 염려가 섞여 맑게 빛났다.

“편안히 주무시길래 그냥 뒀는데… 혹시 악몽이라도 꾸신겁니까?”

“아니, 괜찮습니다.”

필레인은 손을 뻗어 로간의 뺨을 어루만졌다.

한때는 불편한 상대였다. 관심이 없다 못해 그저 귀찮기만 했었던 시절도 있었다. 마지못한 기분으로, 고집을 이기지 못해 곁을 주듯이 연인이 된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아꼈으나 애정과는 거리가 멀었고, 믿었으나 신뢰와는 달랐다. 곁을 내어줬으나 마음을 모두 허락한 것도 아니었다.

정말 오래도록 상처입혔다.

지독하도록 상처입히고, 후회했다.

수천년을 홀로 겪어온 심병(心病)에 취해, 연인이 말라가는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럼에도 결국 로간은 필레인을 떠나지 않았다. 사랑에는 증명이 필요하지 않을진대, 로간은 헌신으로서 그의 사랑을 증명해보였다. 그 과정이 끝내 고난하고 끔찍했다 하더라도 뿌리내린 사랑은 끝내 고사(枯死)하지 않았다. 필레인은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아주 늦게서야 알았다.

“키스해도 되겠습니까?”

필레인의 뜬금없는 질문에 로간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로간의 연인은 점잖은 사람이었다. 종종, 뜻하지 않게 과격해질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이성적이고 침착한 사람이었다. 때와 장소를 구별했고 연인이라 하더라도 스킨십이 잦은 편은 아니었다. 침대를 함께 사용하기는 하지만, 동침이 반드시 교합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싫습니까?”

로간이 주저하는 사이, 필레인은 조금 아쉬운 듯이 물었다. 그는 급히 대답했다. ‘싫을리가요.’ 그 한마디에 필레인은 왠지 기쁜 듯이 눈가를 접었다. 수줍은 소년처럼 웃는 그 얼굴에 로간은 심장이 제멋대로 두방망이 치는 것을 느꼈다. 필린, 연인의 애칭을 입에 담기도 전에 로간은 다가오는 입술에 말소리를 잃었다.

숨소리보다 짙은 빗소리가 들렸다. 잠시간 입술이 떨어질 때 뱉는 숨소리가 낯뜨거웠다. 로간은 제게 입맞춤하는 연인을 내려보며 의자 손잡이를 붙잡았다. 탐닉과는 달랐다. 다정한 교감, 상냥한 입맞춤이 입술을 저릿하게 했다. 혀는 거의 닿지 않았지만 충분히 달았다. 잠시간 숨을 나눈 뒤 필레인은 의자를 붙잡은 채 엉거주춤하게 서있는 제 연인을 바라보았다.

“로간.”

“…… 네.”

“사랑합니다.”

필레인은 의자 손잡이를 붙든 로간의 손 위로 그의 손을 겹쳤다. 로간은 필레인의 말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입맞춤으로 상기된 뺨과 젖은 입술을 가진 청년의 낯이 열감으로 물들었다. 그 단정한 눈망울에 어린 것은 깊은 설렘이었다. 필레인은 그런 로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를 바꾼 사람이 이토록 어리다는 것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알아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바위의 틈새에 뿌리내린 꽃씨가 사라지는 일이던가. 비바람이 분다 하여도 싹이 난 자리에는 끝내 꽃이 맺히기 마련이다. 언젠가 꽃이 시들 때가 올 것이다. 하지만 필레인은 괜찮았다. 아직은 먼 이야기에 불과했다. 섣불리 두려워 할 필요는 없었다.

로간은 필레인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그 진지한 사랑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필레인의 사랑은 그리 가볍지 못했다. 감히 쉬이 입에 담을만한 것이 아니라는 듯 항상 조심스러웠다. 사랑한다. 그 말을 뱉기까지 필레인은 참으로 오랜 시간을 골몰하고는 했다. 로간은 그런 것이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자신으로는 모자라기에, 자신의 사랑으로는 충분치 않기에 필레인이 사랑을 되돌려주는 것을 망설이는 것이라 자책하는 날도 적지 않았다.

필레인이 사랑을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진 건 오로지 로간의 마음가짐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의 눈빛과 시선으로, 조용한 교감으로, 어쩔 때는 몸을 겹치는 열락에서 로간은 필레인이 입으로 내지 못한 사랑을 읽었다. 그것으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부족함을 필레인이 견디지 못하던 시절보다야 행복하지 않은가. 이 이상은 과욕이라고 생각하며 로간은 스스로를 단속했다.

“아, 저… 그게…….”

왈칵 터지는 눈물에 로간은 놀라 몸을 물렸다. 뒷걸음질로 피하는 연인을 보며 필레인은 바늘에 찔린 듯 아픈 표정을 지었다. 제 고백을 못마땅히 여기는가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할 만큼 후퇴한 지능을 가지지는 않았다. 필레인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로간에게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미안합니다.”

“아니, 아닙니다… 저는……. 저는, 흡…….”

필레인은 로간의 등을 쓸어주었다. 어깨에 얼굴을 묻은 연인이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필레인은 그가 외면해왔던 로간의 슬픔을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감히, 그리할 수는 없었다. 필레인은 그토록 아득히 오래도록 살아왔음에도 여전히 어리석었다. 수 천년동안 서른살로 살아왔음에도 마치 매 순간이 처음인 것 처럼 멍청했고 한심스러웠다. 언제쯤 나아질 수 있는지, 필레인은 장담할 수 없었다. 아마 영원토록 나아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로간, 사랑합니다.”

필레인은 로간에게 속삭였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과이자 위로였다. 로간은 그의 간절한 속삭임에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걱정과 불안에 젖은 그의 얼굴이 보였다. 로간은 제 꼴이 우스운 줄을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필레인은 울다 말고 웃기 시작하는 로간의 숨소리에 안도감을 느꼈다. 어깨가 젖어들어가는 감각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그의 연인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졌다는 사실에 안심이 될 따름이었다.

잠시간 울음과 웃음을 견뎌낸 로간은 고개를 묻은 채 이야기했다.

“왜인지 저도 모르게 울컥해서……. 갑자기 울어서 죄송합니다.”

필레인은 그 나지막이 들려오는 사과에, 로간의 부슬부슬한 고수머리에 입술을 대었다.

“……당신이 미안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필레인의 단언에 로간은 입을 꾹 다물었다. 둘의 관계 속에서 필레인은 언제나 죄인이나 다름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연인관계에서 한 명이 죄인이라고 나머지 한 명의 마음이 언제나 편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필레인은 로간의 눈물 젖은 눈가를 손으로 훔쳐주었다. 미적지근한 물기가 손에 묻어나왔다. 필레인은 로간을 달래듯 몇번이고 더 사랑을 속삭이며 입을 맞췄다.

자잘한 입맞춤소리가 깊어지고 짙어지는 사이 빗소리는 점점 더 거세졌다.

필레인은 타액에 젖은 입술을 거두며 숨을 몰아쉬는 로간을 내려보았다. 그의 어린 연인은 적지 않은 입맞춤을 나누었음에도 불구하고 키스만큼은 도무지 능숙해지지 않았다. 숨을 쉬는 것 까지 정직하게 굴다보니 생기는 가벼운 문제였지만 그마저도 사랑스러울 따름이었다. 필레인은 로간이 숨을 쉬는 동안 잠시 환기를 하듯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잠깐 자는 동안 꿈을 꿨습니다.”

“꿈… 이요?”

연인의 되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오래도록 지켜봐온 사람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때의 꿈이었습니다.”

로간은 필레인의 이야기에 마치 강아지가 집중하는 듯 귀를 기울여왔다. 그의 반응에 필레인은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씁쓸한 맛이 나는 이야기에 불과할텐데도, 그의 연인은 필레인의 이야기라면 무엇이든 귀기울이는 선함을 가졌다. 필레인은 방에서 이야기를 하고싶노라 말하며 로간의 허리를 안아 가볍게 들어올렸다.

두 사람이 침대에 몸을 뉘이고도 잠시간은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서로를 마주하여 안고 안긴 연인의 모습은 비오는 바깥 풍경을 잊은 듯 했다. 필레인은 말들을 골라내었고 로간은 초조하지 않게 연인을 기다렸다. 빗소리가 들려오는 창가를 바라보기도 하고, 서로를 마주안은 온기를 느끼기도 하는 시간. 그 고요한 평화 속에서 침묵을 이어가던 필레인은 천천히 운을 띄우듯 입을 열었다.

“티르 코네일을 기억합니까?”

로간은 울라의 북쪽 외곽, 한적하고 자그마한 시골마을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자그마한 냇물이 흐르는 고요한 마을. 구경거리도, 특별한 점도 없는 그 자그마하고 따스한 마을 풍경은 눈을 감아도 쉬이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의 고향 또한 그러한 마을 중 하나였던 탓이다. 잠시간의 상념을 깨는 필레인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있었다.

“티르 코네일의 촌장, 던컨은 제가 이 땅에 처음 왔을 때 만난 사람입니다.”

나오 마리오타 프라데이리는 엄밀히 말하자면 인간이 아니니,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필레인은 그 인자하고도 다정한, 속 깊은 노인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때는……. 아마 당신을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절이었을겁니다.”

당시, 필레인은 힐러에게서 약초를 전달하는 의뢰를 받았다. 영웅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필레인을 심부름꾼 삼아 부리고 싶어하는 자들이 있었다. 필레인은 그런 음습한 자들의 부탁을 대부분 거절하고는 했었다. 하지만 그 날만큼은 로간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에 의뢰를 받아들여 아무렇게나 말을 달렸다. 당시에는 약초를 받는 사람이 던컨이라는 것 조차 몰랐고 목적지에 다다라서야 뒤늦게 깨달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날이 흐린데도, 곧 비가 내릴 게 뻔한 날씨임에도 필레인은 말을 달렸다. 잠시라도 더 로간의 애틋한 시선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곧장 티르 코네일로 갈 수 있는 문게이트도 무시했다. 습기를 머금은 가을의 풍경과 먹구름이 드리워진 하늘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필레인은 아무도 몰아넣지 않은 궁지에 몰려있었다.

그렇게 약초 배달을 위해 도달한 던컨의 집에서, 필레인은 노인의 배려로 잠시 그 집에서 비를 피할 수 있었다.

“저는 그곳에서 변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필레인은 품 안의 로간을 손으로 쓸어만졌다. 로간은 필레인의 설명에 오히려 제가 더 상처입은 듯한 눈빛을 드러냈으나, 필레인은 더이상 그 눈빛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았다. 연인의 염려와 걱정을 쓴 약처럼 억지로 삼키는 짓을 하지 않게된 건 필레인의 좋은 변화였다.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부정할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변하지 않는다는 건 오히려 당연한 일이지 않았나. 그정도로 여기면 다행이었을 겁니다.”

여전히 필레인은 던컨이 부러웠다. 시간에 의해 서서히 늙고 자연적으로 늙고 죽어감이 치졸할정도로 질투가 났다. 하지만 더이상 그것에 매몰될 정도로 허덕이지는 않았다. 이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은 오로지 로간의 덕이었다. 필레인은 사랑스러운 듯이 로간의 뺨에 입맞추었다. 가벼운 접촉에 로간은 기뻐하기보다 서글퍼보였다. 삶의 고통에 짓눌려, 그저 견디는 것 조차 버거워하던 필레인을 기억하는 탓이리라. 이 상황에 도리어 웃는 것은 필레인 뿐이라 기이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제게 던컨이 말하더군요. 제가 변하고 있노라고. 스스로 깨닫지 못하더라도 점점 더 바뀌어갈 것이라고. 그리하여 뒤를 돌아보면 자신이 얼마나 바뀌게 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이…… 당시의 저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필레인은 로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나직이 깊은 숨을 뱉었다. 연인의 단련된 몸은 불편할법도 하건만, 그는 마치 인형이라도 안은 듯 편안해보였다. 로간은 필레인의 깊은 숨소리에 귀기울이며 생각했다. 그의 변화는 긍정적이더라도 그 과정에서의 일들마저 긍정적이었던가.

로간은 차마 당당할 수 없었다. 필레인의 변화를 불러온 것에 로간이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항상 필레인의 고통을, 인내를, 희생을 동반해왔다. 로간 또한 고통과 인내, 희생이 무가치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스스로 변하고자 하여 견디는 것과 타인으로 인해 변화를 견디는 것은 다른 일이다. 필레인은 은연중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을 로간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

“이제는 알겠더군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왜 저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필레인의 목소리는 편안하고 잠잠하여, 마치 긴 생을 회고하는 것 같았다.

“로간.”

“…….”

필레인은 침묵으로 대답하는 어린 연인의 숨소리와, 바깥의 빗소리, 작은 바람소리 따위를 들었다.

“저는 앞으로도 과거를 후회할테지만, 과거와는 다를겁니다.”

조금 거세지는 듯 했던 비가 잦아들고 있었다.

“더이상 나를 무너트리지 않을겁니다.”

그 사이로 햇살이 스미어, 침대에 누운 두 사람의 발끝을 간질였다.

“그러니, 내 곁을 계속 지켜주겠습니까?”

로간은 자신이 들은 말을 잠시간 이해하지 못했다.

필레인은 바뀌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하면, 천지가 뒤집힐 정도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필레인은 변하지 않았다. 곁을 내어주어도, 몸을 섞어도, 함께 많은 일을 겪었더라도 끝내 과거에 발목을 잡혀 로간의 곁에 있지 않은 듯 했던 연인이었다. 필레인은 과거에 묶여 현재에 머무를 뿐 미래를 약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앞으로’를 약속하려 하고 있었다.

로간이 알지 못하던 필레인의 모습이었다.

그의 눈에 환히 웃는 연인의 얼굴이 보였다.

아,

황홀한 배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