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글의 주인공 및 주역은 마비노기 세계관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캐릭터(OC)입니다.
캐릭터의 설정, 관계 도용은 허가하지 않습니다.
캐릭터 설정은 실제 게임의 설정 혹은 플레이와 상이합니다.
이로 인하여 마비노기 설정과 충돌할 수 있으나, 설정오류 지적은 정중히 사양합니다.
마비노기 메인스트림 및 세계관 스포일러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실제 인물, 단체, 지역, 종교, 문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Lased & Flos
write by. UNUS
커나스 씨족은 대대로 너른 초원과 산지를 오가며 거친 말을 기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조상이 북쪽 끝 제국에서 온 핏줄이기 때문에 커나스 씨족의 피가 섞인 사람들은 창백한 피부나 어두운 머리색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대가만 충분하다면 다른 이들이 위험하다며 꺼려하는 용병, 호위, 길잡이 일 따위도 서슴치 않고 받아들였다. 대부분의 의뢰들이 워낙 험하다보니 여러모로 악명이 쌓일 수 밖에 없었지만 커나스 씨족의 그 누구도 이것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같잖은 명예가 당장 다가오는 겨울을 막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소중한 것은 추운 날 입에 넣을 고기와 곡물, 처자식을 따뜻하게 입힐 옷과 거처의 온기를 위한 뗄감, 말에게 풀을 먹일 땅과 모두의 목을 축일 물 뿐이었다. 이를 위해서라면 누군가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 정도야 잡초를 밟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최근에 들어서는 제국이 답지 않게 조용하고 주변 나라들도 평화를 유지하고 있어 오히려 건수가 부족할 정도였다. 커나스 씨족의 남자들이 칼과 활 그리고 총을 들고 활보하는 일이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의 악명은 지독했다.
휘익! 커다란 손 휘파람이 지평선을 갈랐다. 소리에 놀란 검은 갈기의 숫말이 사납게 투레질을 하자 고삐를 쥔 다부진 손이 놈의 목을 툭툭 두드렸다. 주인의 손길에 얌전해진 녀석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콧김을 뿜으면서 발굽으로 땅을 거칠게 긁었다. 자기 주장이 강한 말을 다루는 것은 날 때부터 온갖 말들을 다뤄온 이들에게도 꽤 까다로운 일이다.
“쉬… 요드락. 얌전히 있어.”
하지만 말의 주인은 별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듯 평온하게 명령할 따름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먼 하늘에서 짙은 깃을 가진 거대한 매 한마리가 날아들었다. 놈의 길고 날카로운 발톱이 확 들이치는데도 이를 마주한 남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터운 가죽장갑으로 무장한 손을 들어올려 받아주는 것도 모자라 손가락으로 매의 발목에 달린 끈을 능숙하게 감아 쥐었다. 주인에게 붙잡힌 녀석은 짧고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흥분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남자는 혀를 차는 듯한 소리를 내며 고삐를 쥐던 손의 검지를 들었다. 북실거리는 가슴깃을 쓸어만지며 진정시키는 손길에 예민했던 울음소리가 잦아든다. 그 사이에 뭘 잡아먹었는지 피와 털가죽으로 더러워진 부리를 엄지손가락으로 대충 닦아주자, 녀석은 귀찮다는 듯 고개를 털었다. 시건방진 반응이었지만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본래 날짐승을 다루는 것은 까다롭기 마련이다.
“바르드.”
남자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짙은 남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피곤한 인상을 가지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는 남자의 형이었다. 바르드는 저를 부른 형제를 위아래로 슬쩍 훑더니 지겹다는 기색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아버지께서 찾으신다.”
그럼 그렇지. 빌어먹을 아버지. 폐륜이나 다름없는 생각을 하는 바르드에게서는 양심의 가책을 찾아볼 수 없었다. 벌레라도 씹은 듯 얼굴을 왈칵 구기는 형제의 시건방진 반응에도 칼리드는 바르드를 탓하거나 꾸짖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기분을 이해한다는 듯 한숨만 얕게 흘렸다. 이들의 아버지가 호출하는 이유는 다양했지만 최근 들어 대두되는 가장 큰 이유는 결혼이었다. 둘은 씨족 내에서 가장 강하고 건장하며 능력이 좋기로 소문난 남자였다. 허나 둘 다 결혼은커녕 여자를 길가의 돌 보듯 무시하니 속이 썩어들어가는지, 심심할 때 마다 이렇게 불러들여 재촉을 하곤 했다.
그나마 칼리드는 어릴 때 정해진 상대와 결혼한 전적이 있었다. 비록 병으로 사별하기는 했으나 당시에는 더 없이 애틋한 관계였다. 부인을 떠나보내고 긴 시간을 반 폐인처럼 지내다 겨우 사람으로 돌아온 칼리드에게 재혼은 금기의 단어나 다름이 없었다. 이제 그의 나이가 서른을 넘었기에 슬슬 재혼에 대한 이야기가 슬그머니 튀어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칼리드는 이를 못들은 척 무시해버렸다.
하지만 바르드는 결혼을 한 적이 없는 생 노총각이었다. 내일 모레면 서른이 되는 놈이 열 여섯 먹는 놈들도 가는 장가를 못가다니. 이들의 아버지인 바르바가 보기에 부끄럽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사지 멀쩡하고 얼굴 잘생기고 능력 좋게 낳아주면 뭣하나! 결혼을 안 하는데! 돈을 벌면 뭣하나! 아내도 없고 자식도 없는데! 일 년에 한 번쯤 만난 친척들이 며느리나 사위, 손주들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마다 바르바는 마유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아들들을 노려보곤 했다.
“쓸데없는 장가 이야기라면 듣고 싶지 않은데.”
“그래도 가야지. 아버지이기 이전에 족장이다.”
“썩을.”
“바르드.”
형제의 저지에 바르드는 더 말을 잇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날카로운 인상에 그러고 있으니 험상궂은 얼굴이 따로 없었다. 둘은 각자의 고삐를 쥐고 말의 옆구리를 가볍게 쳤다. 두 마리의 말이 사이좋게 씨족의 유르트-이동식 집-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유르트 앞에 도착했을 때 약속이라도 한 듯 칼리드는 말들의 안장을 거둔 뒤 울타리 안에 넣어두었고 바르드는 매를 횃대에 올리고 눈가리개를 씌웠다. 바깥이 약간 소란스러운 것을 느꼈는지 굳게 닫혀있던 나무 문이 열렸다.
“바르드. 어서 들어와라.”
“카르타부터 넣어두고 가겠습니다.”
“네 형에게 맡기고 어서 들어오거라. 일이다.”
바르드는 삼촌의 말에 눈썹을 휘었다. 슬슬 날이 추워지고 있었다. 말들이야 워낙 굳세다보니 언 땅 밑에 숨은 풀도 긁어내 먹는다고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슬슬 뗄감과 곡물을 사기 위한 돈이 필요한 시점이긴 했다. 말들을 정리하고 돌아온 칼리드에게 가죽장갑을 벗어 건넨 바르드는 형제를 뒤로하고 유르트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내부는 이미 화로에 불을 켜두었는지 훈훈한 공기가 감돌았다. 화로 뒤쪽의 가장 따듯한 자리에는 살림살이가 꽤 넉넉해보이는 노인이 손님으로써 앉아있었다. 손가락이나 목에 건 장신구들을 봤을 때 못해도 꽤 큰 저택을 가진 유력자로 보였다. 저런 치들이 일을 의뢰하러 왔을 때는 대부분 누군가를 죽여달라는 일이 많았기에 느낌이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따위 감상을 내색할정도는 아니었기에 바르드는 익숙하게 앉아있던 삼촌들을 뒤로 물리고 아버지의 왼쪽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녀석이 제 아들 바르드입니다.”
“반갑소. 나는 파르사크 바르단 빈 아랄이오.”
바르드는 일부러 말소리를 내지 않고 고개를 푹 수그려 인사를 대신했다. 아버지가 이미 소개를 했으니 두 번 자기소개를 할 필요가 없는 탓이다. 무뚝뚝한 아들의 행동을 질책할법도 하건만 바르바는 딱히 소리를 내거나 탓하지 않았다. 커나스의 남자들은 경박하게 입을 놀리느니 차라리 닥치는 쪽을 택하는 성정이었으므로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내 딸 아이를 찾아서 데려와달라는 것이오.”
딸? 바르드는 실종된 사람을 찾는 재주따위는 없었으므로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내 딸의 이름은 터헤레 파르사크 빈 아랄, 딸 아이가 마지막으로 있던 곳은 미아스요.”
미아스. 결혼한 여자들이 그토록 신성시한다는, 아이를 서른명이나 낳은 여자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그 여자의 이름이……. 뭐였던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던 탓에 바르드는 머리를 대충 긁어넘겼다. 아무튼 미아스의 무덤은 반 성지나 다름이 없었다. 결혼을 앞둔 여자나 결혼을 한 여자들이 순례하듯 찾아가기에 치안 또한 나쁜 편이 아니었다.
거리가 조금 멀기는 했지만 크게 위험하다고는 할 수 없는 곳이다. 적당히 사람을 보내서 데려와도 될 일을, 굳이 커나스 씨족을 만나서까지 의뢰할 일인가? 시큰둥하게 바닥을 내려보고 있던 바르드의 금색 눈동자가 먹잇감을 찾는 맹수의 그것처럼 매끄럽게 움직였다. 묘하게 서늘한 눈빛을 담담히 마주한 파르사크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채 의뢰의 부수적인 조건을 꺼내어보였다.
“만약 내 딸의 남편을 자칭하는 놈이나 내 딸에게 손을 댄 놈이 있거든, 모두 목을 쳐 가져오시오.”
그럼 그렇지. 바르드의 검지 끝이 바닥을 두드렸다. 결혼을 앞둔 처녀가 부모의 허락을 받아 형제나 친척의 보호를 받으며 미아스를 방문하는 일은 흔하다. 하지만 믿고 있던 이들에게 배신당하거나 한눈을 판 사이에 어중떠중이들에게 납치되어 겁간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재혼을 하는 입장이 아닌 이상, 결혼 전에 순결을 잃는 것은 큰 흠이었으며 이 때문에 여인의 집안이 감당해야 할 지참금이 배로 늘어나곤 했다. 결국 가주들은 불어나는 지참금과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딸을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다행스럽게도 파르사크는 그가 가진 거대한 재산만큼이나 딸을 퍽 아끼는 듯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잃어버린 딸을 찾음과 동시에 딸에게 손을 댄 놈을 죽여오라는 의뢰를 할 리 없었다. 모든 여인이 이렇게 좋은 아버지를 가졌으면 좋으련만.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하고 더러웠다.
“값은 어느정도로 하겠습니까?”
“전부 해서 일만 리디안을 주겠소.”
눈이 번쩍 뜨이는 소리다. 말 스무마리에 맞먹는 돈을 턱하니 내놓겠다니, 부호는 확실히 부호인 모양이다. 바르드는 일만 리디안으로도 꽤 남는 장사라 생각했지만 바르바와 삼촌들은 생각보다 만족스럽지 못한 기색이었다. 그들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족장과 측근들답게 표정을 굳힌 채 파르사크를 바라보았다.
“모자랍니다.”
“허, 이 정도 값이면 일을 받아갈 치들은 많소.”
“그러면 그놈들을 보내십시오. 내 아들놈처럼 남의 머리통까지 냉큼 잘라 올 놈이 몇이나 되겠습니까만은.”
“맞습니다. 바르드만큼 일을 깔끔하게 하는 자가 이 주변에 있다면 오히려 만나보고 싶습니다.”
“그정도로 타고난 자가 있다면 당연히 일을 넘겨줘야지요.”
바르바와 삼촌들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서 당당하게 배짱을 부렸다. 제 아무리 큰 돈이 걸렸다 한 들 이런 의뢰를 받아주는 이들은 흔치 않았다. 만약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재대로 수행할 능력이나 있을지도 의문이다. 결국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을 알기에 하는 짓이지만, 본래 세상살이가 다 그런 법 아니던가. 파르사크는 못마땅한 듯이 바르바를 마주보다가 기싸움을 이기지 못해 머리를 짚었다.
“얼마를 원하시오?”
“선금으로 삼천, 따님을 집까지 무사히 모셔가는 것에 일만, 사냥감은 두당 이천.”
바르드는 제 아비가 바가지를 뒤집어 씌우는 상황을 더 지켜보고 싶지 않았지만, 족장의 일이니 내버려두었다. 애시당초 남의 사정을 일일히 고려할 정도로 성격이 좋은 편도 아니었거니와 남의 목을 잘라야 하는 일이라면 제 목도 잘릴 것을 감수해야하기 때문이다. 전부 목숨값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싼 편일지도 몰랐다. 파르사크와 바르바는 두어 번 정도 씨름을 하는가 싶더니 금방 협상을 마쳤다.
“선금으로 이천, 딸 아이에 일만, 두당 일천 오백. 더는 못내오.”
“…… 어쩔 수 없군. 좋습니다.”
서로 한 발 물러나 준 듯 싶지만, 실상은 바르바의 승리나 다름이 없었다. 선금에 추가금까지 생각하면 최소한 3할은 더 이득을 본 셈이다. 파르사크는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돈을 낸 것에 한숨을 내쉬었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본디 돈이라는 것은 나간 만큼 들어오는 법. 좀생이처럼 굴어봐야 득될 것이 없었다. 노인은 제 옷춤에 손을 넣더니 꽤 묵직해보이는 주머니를 꺼내 바르바에게 건네었다.
누가 봐도 선금인 것을 받아든 바르바는 주머니 속의 은화를 대충 가늠해보았다. 온전해보이는 대은화까지 포함하면 이천 리디안을 훌쩍 넘을 듯 했다. 바르바는 주머니를 잘 묶어 제 뒤에 앉은 바르드에게 넘겨주었다. 어차피 일을 나갈 놈은 제 아들이니, 바로 쥐여주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바르드는 주머니를 받아 내용물을 살피지도 않고 제 옷주머니에 집어넣어버렸다. 족장이 셈한 것을 쥐새끼처럼 다시 살피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내일 바로 가거라.”
“예.”
짧게 대답한 바르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해가 뜰 즘에 바로 나가려면 준비할 것이 적지 않았다. 모포부터 무기, 식량까지 최소한 보름치는 챙겨야 여유분이 있을 터였다. 유르트의 문을 벌컥 열고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가는 바르드의 등을 빤히 바라보던 파르사크는 바르바에게 뜬금없는 것을 물었다.
“무례한 말인 줄은 알고 있소만, 저 바르드라는 사내는 결혼을 했소?”
“…….”
바르바는 차마 제 아들이 저 나이 먹고 결혼도 못한 천치라고 말할 수가 없어 입을 꾹 닫았다. 파르사크는 눈치껏 침묵의 뜻을 이해하고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저렇게 쓸만한 사내가 아랫도리 구실을 하지 못할 리는 없을테고, 눈에 차는 여자가 보이지 않아 고집을 부리는 것이 분명할 터다.
“아깝게 되었군. 슬하에 딸이라도 하나 더 있었으면 바로 꿰어두고 싶을 정도야.”
“그것 참, 이쪽이 더 아깝게 되었습니다.”
“이 정도의 사돈이라면 머리를 조아려서도 받겠는데 말입니다.”
바르바는 저를 놀리듯 농담을 던지는 형제들을 노려보았지만 웃음소리가 잦아드는 일은 없었다. 같은 세대의 형제들 중에서 강한 전사이자 족장으로 지냈던 그의 유일한 약점은 결혼 안 한 아들놈들밖에 없는 탓이다. 태어나서 여지껏 바르바의 형제이자 혈육으로써 그의 그늘아래에 있던 이들이 장난으로라도 족장을 이겨먹고 놀려먹을 기회는 지금 밖에 없으니 더욱 신나게 골려댔다.
유르트 밖에 나와 문을 단단히 닫아둔 바르드는 제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다가오는 여자들의 무리를 보았다. 몇 명의 숙모들과 사촌 형제들의 부인들은 손님의 방문이 꽤 불안한 기색이었다. 이맘때부터 겨울이 지날 때 까지 명절을 제외한 상황에 손님이 온다는 것은 의뢰가 있다는 뜻이다. 대개 커나스의 남자들이 받는 일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기에 훌쩍 나갔다가 죽는 일이 생각보다 잦았다. 아들이나 남편이 죽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그들의 눈빛에서부터 읽혔다.
“추울텐데 뭣하러 나오셨습니까.”
바르드는 최소한의 예의만 갖춘 채 숙모들에게 말을 걸었다. 바르드의 거대한 체구와 붙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투 때문일까, 숙모들 뒤에 선 젊은 여자들은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바르드의 성질머리를 알고 있었기에 각자의 며느리를 품에 안아 달래며 입을 열었다.
“바르드, 손님과의 이야기는 어찌 되었니?”
“잘 되었습니다. 궁금한 게 있으시면 그냥 들어가서 물어보시죠.”
“아니, 그건 좀……. 그냥 누가 가는지만 알려준다면 좋겠구나.”
바르드는 여자들이 내비치는 불안감의 뿌리를 알았다. 평범하게 사냥을 하고 돌아와도 살이 떨릴 상황에 사람을 죽이고 오는 게 기꺼울 리 없었다. 심지어 그렇게 나간 사내가 죽기라도 한다면 더욱 참담할 터였다. 젊은 여자의 경우 아이라도 낳았다면 씨족에서 죽을 때 까지 책임지지만, 아이가 없다면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결혼을 했다가 남편이 죽어 고향으로 돌아간 여자의 삶은 행복과 거리가 멀었다. 숙모들의 처지도 며느리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반평생을 남편이 객지에서 죽을까 걱정하다가, 이제는 아들들이 죽을까 발을 구르고 걱정하는 게 편할 리 없었다. 바르드는 여인들이 불안해하는 꼴을 오래 보는 취향이 없었으므로 지체하지 않고 본론부터 말해주었다.
“이번 일은 저 혼자 갑니다.”
“아…….”
젊은 여자들 중 하나가 안도감에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얼굴과 옷 차림새를 보아하니 올해 사촌 형제 중 막내와 결혼한 이였다. 여자들이 놀라 그를 일으키고 부축하는 소란 속에서도 바르드는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다. 사촌의 여자에게 괜히 가까이 다가갔다가 쓸데없는 오해라도 받으면 곤란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새 제 발치에 딱 붙어 눈치 없이 옹알대는 조카의 머리만 대충 쓰다듬어주었다.
여자들의 작은 소란이 가시고 묘하게 뒤숭숭한 밤이 지났다.
바르드는 자신의 애마, 요드락의 등에 채운 안장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편도로 최소 보름은 걸리는 거리이니 준비가 철저한 편이 좋았다. 미아스에 그 여자가 있는지 없는지도 확인해야했고, 없다면 그 뒤의 일 또한 생각을 해봐야했다. 파르사크는 딸이 미아스에 반드시 있을 것이라 했지만 세상 일이 어디 그렇게 말처럼 쉽기만 하던가. 일만 리디안짜리 일이니 철저한 편이 좋았다.
짐말에 얹을 짐은 전날 밤에 미리 만들어두었으니 얹어서 묶어두기만 하면 될 터. 미아스까지 가는 길은 물터가 적으니 물주머니를 좀 든든하게 채워두는 편이 좋으리라.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짐을 올리려는 바르드의 뒤에서 누군가가 손을 거들어주었다. 뒤를 슬쩍 보니 친척형제들 중 하나였다. 바르드와 동갑인 그는 짐말 위에 얹어진 짐을 솜씨 좋게 고정했다.
“어머니께 들었다. 너 혼자 간다며.”
“그게 편하니까.”
“허이구, 장가도 못 간 주제에 재수없는 놈 같으니.”
바르드는 툴툴거리는 형제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저보다 먼저 해낸 것이 장가드는 것 뿐인 멍청이와는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짐말의 고삐와 끈을 묶는 형제를 흘긋 본 바르드는 가장 중요한 연장을 챙겼다. 길쭉하고 날카로운 곡검과 제국인들이 쓴다는 총 한정, 비상용으로 쓸 활과 화살까지 챙기자 산적조차 피할듯한 인상이 되었다.
“어디까지 가냐?”
“미아스.”
“미아스? 별난 곳을 다 가네. 족장께선 거기까지 가는 김에 신부 하나 찾아오라 하지 않으시든?”
“개소리 작작하고 끈이나 묶어.”
“거 까칠하기는.”
사촌의 도움으로 출발 준비를 마친 바르드는 냉큼 애마의 안장 위에 올라탔다. 이제 출발하려는 때, 바르드는 바르바가 유르트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밤새 술을 거나하게 마셨는지 얼굴이 좀 부어오른 아버지의 모습에도 바닥난 효심은 차오를 기미가 없었다.
“더 주무시지 그러십니까.”
“바르드.”
“예.”
“미아스까지 가는 김에 여자 좀 만들고 오거라.”
사촌의 헛소리를 그대로 읊는 아버지에 바르드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직전의 예언을 적중시킨 친척은 얼굴이 시뻘개질 정도로 웃음을 꾹 참았다. 여기서 웃으면 걷어차인다, 여기서 웃으면 걷어차인다. 사촌은 걷어차이고 싶지 않다는 일념으로 실룩거리는 얼굴에 필사적으로 힘을 주었다. 그의 두툼한 입술이 옹졸하게 모이는 꼴에 바르드는 경멸하는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일 하러 가는 겁니다.”
“안다.”
“의뢰중에 여자따위를 만날 여유가 있을 것 같습니까?”
“나도 했는데 너라고 못하겠느냐?”
이런 썅. 바르드는 짜증을 견디지 못하고 말을 몰았다. 아버지의 헛소리를 더 들어주려 하다가는 출발이 미뤄질 것 같았다. 바르바는 끝까지 장가 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고 멀어지는 아들을 보며 속이 타는 양 혀를 쯧쯧 찼다. 올해는 저 놈이 장가를 가야할텐데……. 하는 바르바의 중얼거림에 사촌은 더 이상 웃음을 참지 못하고 ‘푸학!’ 소리를 내며 자지러졌다.
바르드는 열이틀에 걸쳐 미아스까지 쉴 새 없이 달렸다. 미아스에 도착해서는 바로 터헤레 파르사크 빈 아랄의 흔적을 쫓았다. 당연하게도 그 여자는 마을에 없었으며 터헤레를 얼핏 본 것 같기도 하다는 미아스 토박이들의 증언이나 주워들을 수 있었다. 이런 저런 소문과 이야기들을 거슬러 오르던 바르드는 터헤레와 비슷한 외형의 여자를 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목격자는 어린아이였지만 ‘해가 다 저물었을 때 미아스에서 제법 떨어진 외진 마을이 있는 길로 들어갔다.’는 명확한 목격담은 무시할 수 없었다.
어린아이의 눈은 어른의 그것보다 정확했다. 거짓말일 수도 있겠으나 바르드를 상대로 사기를 칠 만큼 간이 배밖으로 나온 아이는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다. 바르드는 쓸모있는 정보를 준 영리한 꼬마에게 꿀 묻힌 빵을 한아름 사주었다.
주변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니 외진 마을의 이름은 아샤였다. 그 곳은 마땅히 만들어 둔 길이 없어, 사람이 드나들며 생긴 길을 타고 가야 하는 험난한 곳이었다. 말조차 다닐 수 없다보니 산양이나 염소를 짐말 대신으로 쓴다는 말에 바르드는 할 말을 잃었다. 짐을 짊어지고 깎아지르는 산을 제 발로 걸어 올라가야한다는 것이 못내 귀찮았으나 못할 것도 없었다.
바르드는 적당히 믿을만한 인물에게 돈을 주고 짐과 말을 맡겼다. 맡겨놓을 짐에서 당장 필요한 것만 나누어 챙긴 그는 총을 앞으로 메고 등으로는 짐을 업었다. 횃불로 쓸 몽둥이같은 나무토막까지 챙긴 바르드는 지체할 것 없이 산길을 올랐다. 말을 타는 것이 편해서 그렇지 두 발로도 못 갈 곳이 없었다. 사람의 발로 다져진 길을 평지 걷듯 걸으며 한나절만에 산길을 주파한 바르드는 시골마을 한자락에서 젊은 남자와 함께 있는 터헤레를 찾아낼 수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바르드의 예상과 달리 터헤레는 친척들에게 배신당해 팔려간 듯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중떠중이인 남자에게 당했다기에도… 기가 살다 못해 목소리까지 크게 내는 것을 보아 절대로 험한 일을 당한 인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젊은 남자가 여자에게 절절 매고 있었다. 터레레의 말 한마디에 뭐 마려운 개처럼 끙끙대는 꼴이 씨족 내에서 아내들에게 잡혀 살던 사촌 형제들을 떠올리게 했다.
결국 이를 멀리서 지켜보는 것으로는 판단하기 어렵다 결론지은 바르드는 해가 뜰 아침 즈음에 터헤레의 집을 방문했다. 그들은 외지인이면서도 위험해보이는 바르드의 방문을 경계하면서도 ‘파르사크가 보냈다.’는 말에 멈칫했다. 어쩔 수 없이 집으로 손님을 받아들인 젊은 부부는 자초지종을 묻는 것에 거리낌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전부터 터헤레는 그의 아버지가 고른 약혼자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는 몰라도 ‘그딴 남자와 결혼하느니 혀를 물고 죽겠다.’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보통 싫은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터헤레는 결혼을 피하려 온갖 꾀를 내었지만 그 때 마다 파르사크의 뜻은 강건했고 약혼자 또한 물러설 기미가 없었던 듯 하다. 결국 방도가 없었던 터헤레는 어릴때부터 형제처럼 지내던 사촌을 필사적으로 설득해 혼전 순례를 빙자해 미아스까지 도망나왔다고 했다.
하지만 혼인하지 않은 여자가 미아스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고작 하루 이틀 정도다. 사촌마저도 이제 그만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자 터헤레를 달래던 중, 그의 눈에 평생 그려왔던 이상형이 나타났다. 그게 바로 지금의 남편인 아르슬란이었다. 아샤 마을 출신인 그는 꽤 가난한 형편에서 태어나 자라왔고 마흐르-신부에게 주는 지참금-를 낼 돈이 없어 스물 다섯이 되고도 결혼을 하지 못했다. 터헤레는 아르슬란의 형편과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늦은 밤에 여자의 몸으로 몸을 지킬 무기나 길을 밝힐 횃불도 없이 단신으로 깎아지르는 아샤 산을 올랐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행동력 넘치는 터헤레는 아샤 마을에서 아르슬란을 만나자마자 저돌적으로 그를 잡아 덮쳤던 모양이다. 아르슬란은 처음 보는 여자가 갑자기 그를 끌고 들어가 덮치는 상황에 놀라 떨쳐내고 내쫓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어여쁜 여자가 저 좋다며 냉큼 올라타는 일이 흔하게 있는 일도 아니고 이 행운을 놓치면 언제 또 여자와 닿아보나 싶은 마음에 안돼, 안돼, 하다가 홀라당 넘어가버렸단다. 결국 두 사람은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르고 얼렁뚱땅 밤을 보낸 것도 모자라 아샤 마을에서 결혼식까지 올려 지금에 이르렀다.
여기까지 들었을 때, 바르드는 이 정신머리 없는 여자가 객사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샤 마을까지 오르는 산길은 상당히 가파르고 위험했다. 장성한 남자도 삐끗하면 떨어져 죽을 길을 달빛 아래에서 걸었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심지어 남자의 성격이나 평소 행실도 알아보지 않고 생긴 것이 이상형이니 일단 달려들었다니……. 이렇게 대책 없이 날뛰는 여자를 집 밖에 풀어놓은 파르사크가 천치로 보이기 시작했다. 여자가 감히 조신하지 못하다던가 하는 늙어빠진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광견을 집 밖에 풀어둔 무책임함에서 느껴지는 한탄이었다.
바르드는 짧은 한숨으로 감정을 정리하고 터헤레와 아르슬란 부부를 보았다.
“터헤레. 네 아버지인 파르사크는 내게 너의 신변을 찾아달라고 의뢰했다.”
“그런데요?”
“끝까지 들어라. 파르사크는 네게 손을 댄 놈, 네 남편을 주장하는 자의 목을 잘라올 것도 요구했고 나는 그 조건까지 받아들인 상태다.”
“…… 네?”
“선택권을 주겠다. 지금 당장 나를 따라 아랄로 간다면 저 자를 살려주마.”
바르드는 허리춤의 칼을 칼집채로 풀어 바닥을 강하게 찍었다. 쿵! 하는 묵직한 소리가 젊은 신혼부부의 신경을 쭈뼛 서게 만들었다. 칼을 쥔 바르드의 금색 외눈은 맹수, 특히 호랑이의 눈알처럼 섬뜩한 빛을 발했다. 터헤레는 소름끼치는 감각이 무엇인지 모르고 얼어붙었고 아르슬란은 바르드의 서릿발같은 기세가 살기라는 것을 대번에 눈치챘다.
“만약 거부한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저 자의 목을 자른 뒤에 너를 묶어 끌고 갈거다.”
거짓이라고는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는 단언이었다. 아르슬란은 덜덜 떨리는 몸으로 애써 아내를 등 뒤로 숨겼다. 평생 겪어본 적 없는 살기에 오금이 저렸지만 저보다 작고 어린 부인을 훤히 내버리는 것 보다는 나았다. 아르슬란의 헌신적인 보호에 숨은 채 숨통이 트인 터헤레는 지금 제가 마주한 남자가 평범하거나 만만한 무언가가 아님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가, 가요! 간다고! 갈게요!”
거의 발악하듯 외치는 터헤레의 대답에 바르드는 금세 살기를 거두었다. 바짝 긴장한 아르슬란은 살기가 거둬지고도 한참이 지난 뒤에 겨우 숨을 쉬었다. 그는 몸 전체가 식은땀으로 푹 젖어있었고 손발은 주체할 수 없이 덜덜 떨렸다. 아주 잠시간 정면에서 견뎌낸 것 만으로도 오금이 다 저리는 상대다. 저런 사내가 진심으로 죽이겠다고 덤벼든다면 아르슬란같은 자는 순식간에 죽어나갈 것이 분명했다.
“꼭 이렇게 협박을 해야 해요!?”
터헤레는 악에 받친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듯이 소리를 높였지만 바르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네가 자초한 일이잖나.”
폐부를 찌르는 바르드의 말에 터헤레는 무어라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달싹거렸다. 아버지의 뜻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반항할 수는 있다. 약혼자가 싫어 다른 남자를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촌을 이용해 고향에서 보름이 넘는 지역까지 나와 일면식도 없는 남자를 덮쳐 살림을 차리고 가족과의 연락을 끊는 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짓이었다. 철이 없다는 말로도 도저히 감싸주기 힘든 행패를 저지르고도 반성하는 기미가 없으니, 바르드 또한 최소한의 배려를 모두 던져놓았다.
“두 시간을 줄테니 짐을 챙겨라.”
“저… 저도, 함께 가고 싶습니다.”
“여보!”
바르드는 뜬금없이 나서는 아르슬란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제 아무리 터헤레가 먼저 덮쳤다 한 들, 파르사크는 그를 고깝게 볼 것이다. 심지어 돈 없는 시골 출신의 총각이라 하면 더더욱 못마땅해 할 터. 그럼에도 아랄에 가고싶다는 건 사지로 기어들어가는 꼴이었다. 빤히 알면서도 함께 가고싶다는 아르슬란의 말에 터헤레는 깜짝 놀랐다.
“아무리 졸속으로 맺어진 부부의 연이라도 저는 터헤레의 남편입니다. 아내가 친정까지 먼 길을 가는데 혼자 보낼 순 없습니다.”
“너와 터헤레는 서로가 부부라고 주장하지만, 파르사크는 너희의 관계를 허락한 적이 없다. 내가 너를 죽이지 않은 이유는 오로지 저 여자를 데려가기 귀찮아지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따윈 없어. 아랄까지 가서 개죽음당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여기에 남는 게 좋을거다.”
“아뇨. 장인어른께서 저를 죽이시더라도 가야겠습니다. 아랄까지 스무날은 꼬박 걸릴텐데, 그동안 터헤레가 혼자 고생하게 두고싶지도 않고… 터헤레가 아랄로 가는 도중에 도망치지 않게 제가 잘 잡아둘 자신도 있습니다.”
바르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더 없이 성급하게 맺어졌지만 아르슬란은 터헤레를 퍽 진심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깟 감정이야 제 알 바 아니었지만, 아르슬란을 이용해 어디로 튈지 모르는 터헤레를 제어하는 건 나쁜 생각이 아니었다. 저를 제어하겠다는 말을 들어놓고도 남편이 함께 가준다는 것에 감동을 받아서인지, 터헤레는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아르슬란의 손을 잡으며 신혼부부 특유의 알콩달콩한 눈빛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나는 충분히 경고했으니 후회하지 마라.”
한쌍의 바퀴벌레처럼 끈끈한 두 사람을 짜게 식은 눈으로 쳐다보던 바르드는 손에 쥐고 있던 칼을 거두어 허리춤에 다시 걸었다. 풀어진 끈을 단단히 묶는 손길은 숙련된 전사 특유의 습관이 배어있었다. 잠시간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르슬란은 터헤레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 대단한 살림을 가진 것이 아니었기에 한 시간이 조금 지날 즘에 짐정리가 끝났다. 자정이 다 되어가자 터헤레는 점심이라도 먹고 가자며 출발을 미루려 들었다.
“점심인데 좀 먹고 가는 게 낫잖아…… 요? 도망치려는 것도 아니고, 밥은 먹고 가자는건데.”
바르드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지레 찔려서 종알대는 터헤레를 무시한 채 하늘을 살폈다. 언제까지 맑을지는 몰라도 당장은 구름이 적고 습기가 적게 느껴졌다. 날씨를 충분히 살핀 바르드는 터헤레-아르슬란 부부가 점심을 준비할 동안 미아스에서 해야 할 일들을 가늠해보았다. 두 사람이 탈 말을 수배하고 야영에 쓸 짐을 더하고……. 예상치 못한 일행이 하나 늘어나니 생각해야 할 것이 세배쯤 늘어버린 듯 하다. 어설프게 출발했다가는 다른 마을에 들를 때 까지 고생할테니 준비는 확실히 하는 편이 좋았다.
비용과 시간을 다 가늠할 즈음, 아르슬란이 자박한 기름에 구운 삼사로 가득한 접시를 가져왔다. 바르드는 그것을 먹을 생각이 없었으나 끈질기게 권하는 것에 못이겨 어쩔 수 없이 하나를 집어먹었다. 제 숙모들이 만드는 것과 크게 다를 것 없었지만 속재료에 고기가 부족한 탓인지 생각보다도 더 밋밋하고 투박한 맛이 났다. 바르드는 뭐든 잘먹는 편이었기에 별 불만이 없었지만, 화덕에 구운 삼사쪽이 훨씬 낫다는 생각 정도는 했다.
점심식사를 마친 뒤, 아르슬란은 마을의 촌장을 찾아가 아내의 친정에 다녀올 일이 생겨 얼마간 집을 비울것이라 설명하고 돌아왔다. 그 사이 터헤레는 식사의 뒷정리를 끝내고서 짐을 챙겨 집 앞으로 나왔다. 바르드는 아르슬란이 돌아오기 무섭게 터헤레가 가지고 나온 짐을 던졌다. 꽤 무거운 짐을 덥석 받아든 그에게 앞서라는 듯 턱짓으로 길을 가리키는 것은 덤이었다. 산길을 잘 아는 이가 제일 앞에 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에 아르슬란은 별 불만없이 짐을 메고 산길을 내려갔다. 그 뒤를 터헤레가 바짝 붙었고 바르드는 약간의 거리를 유지한 채 둘을 따라 움직였다.
아샤의 토박이답게 산길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아르슬란의 발걸음은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터헤레는 산길에 익숙하지 않으니 길이 험한 곳에서는 남편을 지지대삼아 길을 걸어야했다. 바르드는 저 알아서 턱턱 걸어내려오니 굳이 신경쓸 것도 없었다. 조금 위험한 지름길까지 아낌없이 사용해가며 부지런히 걸은 덕분에 세 사람은 해가 거의 저물었을 때 미아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홀로 산에 올랐을 때는 하루종일 걸어야했던 길이 줄어든 건 나쁘지 않았다.
미아스에 도착한 바르드는 지체없이 마을을 돌며 빈 방이 있는 집을 수배했다. 이렇게 늦으면 방을 빌리지 못할 수도 있었기에 행동이 빨랐다. 다행히도 마을 중심가에 가까운 집에서 방이 남는다며 선의를 비쳤고 바르드는 넉넉한 사례로 감사를 대신했다. 빌린 방에 터헤레 부부를 밀어넣은 바르드는 ‘식사를 가져올테니 기다려라.’ 라는 말만 남겨놓고 다시 밖으로 향했다. 그는 아직 열려있는 식당마다 작은 은화를 서너개씩 던져넣으며 터헤레 부부가 있는 방 위치를 이야기했다. 음식이야 저들이 돈값만큼 알아서 가져다줄테니 굳이 뭘 달라 말라 할 필요는 없었다.
식당들을 죽 돌아본 바르드는 해가 졌음에도 불구하고 상인이나 사람들로 시끌벅적한 술판에 들어섰다. 웬 시커먼 덩치가 한창인 술판에 들어서니 사람들의 시선이 확 쏠렸다. 어중떠중이라면 깜짝 놀라서 실례했다거나 바짝 긴장해 어물거렸을테지만 바르드는 그들을 죽 둘러보며 제가 찾는 사람이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앉은 무리들을 헤치고 나아간 바르드는 이내 짧은 머리에 독특한 조끼를 두른 남자의 어깨를 짚었다.
“급히 보낼 연락이 있다.”
“바 카말 멜 (با کمال میل, bā kamāl mel, 기꺼이), 어디로 보낼 거지?”
“아랄의 파르사크에게.”
“이야, 멀기도 하네. 그 정도면 뒷주머니가 좀 넉넉해야겠어?”
바르드는 술잔을 받는 척 하며 남자의 옆에 털썩 앉았다. 지금부터는 파발꾼과의 신경전이었다.
“육백.”
“천.”
“오백.”
“구백오십.”
“사백.”
“어이, 거기서 더 깎는 건 아니지. 구백.”
“삼백.”
파발꾼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돈으로 초세기를 하는 미친놈은 살다살다 처음본다는 듯한 눈이었다. 간만의 일로 한탕 해보려던 파발꾼은 바르드를 등쳐먹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바로 술잔을 비운 뒤 항복을 외쳤다.
“항복! 육백.”
“오백.”
“에라이, 이 벼룩도 빨아먹을 놈아!”
“사백.”
“형님, 형님! 오백으로 합시다!”
바르드는 냉큼 꼬리를 말고 팔에 매달리는 놈을 귀찮다는 듯 떼어내었다. 본래는 이백까지 깎아도 무방하지만 값을 바짝 줄이기만 하면 소식이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다른 일이었다면 파발꾼까지는 사용하지 않았겠지만, 이번 일은 소식을 전하는 게 생각보다 중요했다. 바르드는 품에서 대은화를 꺼내어 파발꾼의 술잔에 튕겨넣었다. 빈 잔에서 동전이 뒹굴며 나는 둔탁한 소리는 술 마시는 사람들의 소음에 깔끔하게 묻혔다.
파발꾼은 냉큼 빈 잔을 뒤집어 은화를 꺼내 쥐었다. 술이 묻어 찝찝할법도 한데, 아랑곳 않고 바지에 슥슥 닦아 품에 넣기 바쁜 것을 보니 어지간히도 돈이 궁한 모양이다.
“그래서, 형님께서 아랄의 파르사크에게 전하실 말은?”
“딸을 찾았다.”
바르드는 미아스에 하루를 더 머물렀다. 게을러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하루종일 바빴다. 터헤레와 아르슬란이 탈 말과 둘의 짐을 짊어질 짐말을 구하는 것을 시작으로 따로 맡겨두었던 자신의 말들을 찾았다. 터헤레 부부가 준비한 짐에서 부족한 것을 추려서 따로 구하고, 야영을 할 때 틈틈히 먹어야 할 건량들도 넉넉히 사서 짐에 더해두었다. 혹시 모르니 튼튼한 물주머니도 여럿 사두어 우물 물로 채워두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터헤레는 말을 탈 줄 알았다. 아르슬란은 당나귀만 타보았다며 곤란해했지만 말을 타는 것이나 당나귀를 타는 것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었기에 금방 익숙해졌다. 이들의 목적지는 아랄이었지만, 미아스에서 아랄까지 쉴 새 없이 달리는 것은 장성한 남자에게도 꽤 무리가 가는 일이었다. 바르드는 어쩔 수 없이 당장의 목적지를 투카이로 정할 수 밖에 없었다.
미아스에서 투카이까지 가는 길은 그리 험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지와 완만한 언덕이 전부였기에 약간은 지루하기까지 했다. 식사와 수면시간, 잠시 숨 돌릴 시간따위를 제외하면 하루종일 말을 탔기에 몸이 배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틈틈히 허리를 펴거나 몸을 풀어가며 나아가기를 닷새 째 되던 날 밤. 시바이 산 근처에서 야영을 준비하던 바르드는 갑자기 산등성이 위를 올려보았다.
“…바르드씨, 무슨 일 있습니까?”
모닥불을 살피다 말고 갑자기 산 위를 노려보는 바르드의 행동에, 건량을 꺼내어 아내에게 쥐여주던 아르슬란은 어리둥절해하며 말을 걸었다. 잠시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던 바르드는 이내 고개를 젓고 꺾여있던 나뭇가지를 모닥불 위에 던져넣었다.
“아무 것도 아니다.”
“겁 먹은 거 아닐까? 이 앞에 있는 산이 악명높기로 유명한 시바이 산이라면서.”
“터헤레.”
철부지처럼 말하는 아내를 가볍게 타박한 아르슬란은 죄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꾸벅였다. 바르드는 시비를 걸든 말든, 사과를 하든 말든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아르슬란에게 손을 뻗어 그가 쥐고 있던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주머니 안에 담긴 말린 대추야자를 두세알 정도 꺼내 입에 넣고 씹으니 혀가 아릴 정도로 단 맛이 뇌를 강타했다. 며칠동안 느리게 말을 몰았던 탓에 약간 피로했던 정신이 확 돌아왔다. 뻐근했던 몸을 풀며 감각을 되살린 바르드는 허리춤에 걸고 있던 칼을 허리끈과 함께 풀어 아르슬란에게 던져주었다.
“빌려주지.”
“……예? 카, 칼을?”
“저 여자의 말마따나 이 뒤의 산은 여행자의 무덤으로 유명한 시바이 산이다. 언제 어떻게 무슨 일이 터질지 알 수 없지. 그러니 네 몸과 아내는 너 스스로 지킨다고 생각해라.”
“저… 저는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습니다.”
이보다도 더 무거운 짐도 아무렇지 않게 들고 날랐건만, 단순히 칼이라는 이유로 얼어붙은 아르슬란을 보며 바르드는 한심하다는 듯 눈을 좁혔다. 그는 모두가 자신처럼 강인하게 태어나 전사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갑자기 던져진 칼을 섣불리 쥐지 못하고 겁을 먹는다 해서 마냥 나약하다고 볼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상황에서까지 움츠러드는 건 한심하다는 생각을 도저히 버릴 수 없었다.
“저 산에서 사람을 죽이는 게, 네 눈앞에서 아내가 겁탈당하는 것 보다 더 무섭나?”
“…….”
바르드가 도발하듯 던진 말에 눈을 홉뜬 아르슬란은 턱에 힘을 주었다. 얼렁뚱땅 맞이한 부인이더라도 터헤레는 그에게 있어 생에 다시 없을 행운이었고 행복이었다. 그런 아내가 이름도 모를 사내들에게 겁탈당하고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니. 상상만으로도 속이 뒤틀리고 눈에 핏발이 섰다. 단단히 말아쥔 주먹은 힘을 견디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렸다.
“남의 남편한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아니, 알겠습니다.”
“아르슬란?”
아르슬란은 힘이 들어간 손을 억지로 펴, 바르드가 던져준 칼을 잡았다. 칼집에 들어찬 칼이 움직일 때 절그럭거리는 감각이 더 없이 소름끼쳤다. 억지로나마 식칼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니 그렇게까지 두렵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잠시간 숨을 고른 그는 칼과 이어진 허리끈을 제 몸에 묶어 고정시켰다. 매듭을 당기는 손끝이 형편없는 꼴로 떨렸지만 눈에 깃든 각오와 비장함만큼은 여느 전사 못지 않았다.
갈등과 불안이 고조되는 밤이 지난 뒤, 바르드 일행은 산길을 걷고 있었다. 말을 탈 수 있으면 좋았겠으나 워낙 길이 험하다보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나마 몸이 가벼운 터헤레는 앉아서 가겠다며 고집을 부렸지만 바르드는 말이 삐끗하면 같이 떨어질 수 있으니 헛생각 하지 말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산 중턱을 넘어갈 무렵. 일행은 상인으로 보이는 무리를 만났다. 이 앞부터는 야영할만한 평지를 찾을 수 없으니 쉬었다 가는 것이 좋다는 말에 아르슬란과 터헤레가 먼저 바르드를 붙잡았다. 둘의 고집과 애원에 어쩔 수 없이 이동을 멈추기로 한 바르드는 말들이 흩어지지 않게 단단히 묶어두고서 야영을 준비했다. 간만에 낮부터 쉴 수 있게 된 터헤레와 아르슬란은 부러 상인들에게 우호적인 자세로 다가가 말을 걸었는데, 이들은 젊은 부부의 싹싹함에 웃으며 저들이 요리한 음식을 나누어주었다.
두 사람이 순진하게 식사를 하는 동안 바르드는 상인들 중 가장 연륜있어보이는 인물과 입을 텄다. 약간 구부정한 듯 하지만 큰 덩치를 가진 상인은 덥수룩한 턱수염을 만지며 시바이 산 주변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투카이 주변은 별 문제가 없으나, 시바이 산과 이어진 산맥 북쪽은 심각했던 모양이다. 제국과 가까운 누를랏은 마을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는 소식에 바르드의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마을이 사라졌다는 건 그 마을의 여자들과 아이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을 뜻한다. 자신과는 관계없는 사람일지언정 씨족 하나가 소멸해버린 참담한 소식 앞에 평정심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다.
“라흐메틀린 루흐이 샤트 볼순(Rahmetliň ruhy şat bolsun, 고인의 영혼이 평안하기를)”
“라흐메틀린 루흐이 샤트 볼순”
바르드가 먼저 손으로 얼굴을 가린 뒤 애도를 읊자, 상인 또한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똑같은 말을 읊었다. 잠시간 그 모습을 살피던 바르드는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숨을 골랐다. 필요한 것은 다 들었으니 쉬고있는 이를 더 붙잡을 이유가 없었다. 바르드는 상인에게 이야기를 해주어 고맙다는 뜻에서 고개인사를 남긴 뒤, 식사를 마친 채 조잘거리는 일행에게 다가갔다. 상인들이 나누어 준 음식을 야무지게 먹어치운 터헤레는 그새 긴장이 풀리고 기분이 좋아졌는지 바르드의 험담을 하고 있었다.
“진짜 너무 힘들어. 더 가야한다. 더 가야한다. 아직 멀었다. 맨날 똑같은 말만 하지 정확히 알려주는 것도 없잖아. 대체 투카이까지 얼마나 걸리는 거야?”
“모레 점심쯤에 도착한다.”
“…… 어?”
“벌써 그렇게까지 왔습니까?”
“오늘 여기서 쉬고 가자고 조르지 않았더라면 내일 해질 때즘엔 도착했을 거다.”
정곡을 찌르는 말에 터헤레가 조용해지자 바르드는 아르슬란의 어깨를 두드렸다.
“쉬고 있을테니 밤이 되면 깨워라.”
“예? 아… 예, 알겠습니다.”
대답을 듣기 무섭게 물러난 바르드는 거대한 바위 그림자 아래에 방석처럼 접은 모포를 두고 소리나게 주저앉았다.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몇날며칠 동안의 강행군은 그에게도 퍽 피곤한 일이었다. 터헤레와 아르슬란이 도망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야하기에 바르드는 미아스를 떠난 이래로 단 한번도 편히 잠들지 못했다. 말 위에서 틈틈히 졸기는 했지만 깊게 잠들지 못한 피로를 풀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그나마 지금의 야영지는 상인들이 있었다. 상인으로 위장한 산적일 수도 있지만 바르드가 판단하기로는 상인이 맞았다. 최소한 타인의 죽음을 언급할 때 엄숙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그러했다. 산적으로 사는 놈들은 사람의 죽음을 가볍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런 성향은 나이가 많을수록 숨기지 못하는 경우가 흔했다. 하지만 바르드가 상대한 상인은 진심으로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고 참담함을 숨기지 못했으므로 믿을만하다고 판단했다.
상인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물건과 재산, 목숨을 모두 감당해야하는 이들이기에 어중떠중이들은 상대도 되지 않는다. 저들이 깨어있는 낮이라면 눈을 붙여도 무방하리라. 그러다 죽는다면 결국 제 판단이 어수룩했다는 것이니 후회할 것도 없었다. 등에 메고 있던 총을 앞으로 돌려 끌어안듯 붙잡은 바르드는 얕은 숨을 길게 뱉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아르슬란은 상인들과 모여 앉은 자리에서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았다. 좀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모포만 깔고 앉아서 자는 것이 못내 신경이 쓰였다. 터헤레 또한 아르슬란과 비슷한 감상인지 몇 번이고 뒤를 힐끔거리며 바르드를 살폈다. 지독한 강행군 덕분에 억지로 익숙해지고 있지만 노숙은 어찌되었건 노숙에 불과했다. 편히 누워서도 몸이 배기고 못 살 지경인데 앉아서 자고 있으니 보는 사람이 다 답답할 지경이다.
“냅둬. 총 든 사람은 흘기는 거 아녀.”
그런 두 사람을 말 없이 지켜보던 넉살 좋아보이는 상인은 차가 끓는 주전자를 거두며 툭 던지듯 말을 걸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이구, 뭘 처음 듣는다는 듯이 그려?”
“아니, 그… 처음 듣습니다.”
“저도 처음 들어요.”
주전자에서 차를 따라낸 상인은 다른 이들에게 잔을 돌렸다. 이내 찻물이 부족해지자 주전자에 물을 더 넣고서는 불씨를 잔뜩 머금은 장작에 바짝 붙여놓았다. 그는 물이 끓기를 기다리면서 어리숙한 부부가 연신 시선을 떼지 못하던 새카만 남자를 스치듯 보고 시선을 거두었다.
“총이든 활이든간 아무튼 쏴 죽이는 것을 든 것들은, 눈을 본 놈부터 쏘는 법이여.”
“어…….”
“활은 시위에 메는 시간이라도 있겄는디, 총이 그런게 있는가. 그러니 흘기지들 말어.”
말을 마친 상인은 제 터번을 풀어 귀가 사라진 오른쪽 얼굴을 드러냈다. 누가 봐도 총에 맞아 날아간 흔적과 흉터가 살벌했다. 터헤레는 양 손으로 입을 막았고 아르슬란은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조금만 머리 중심에 가까웠더라면 눈을 잃거나 머리를…….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하자 방금 먹었던 것들이 올라올 것 같았다. 호기심을 못 이겨 죽고싶지 않거든 시선 관리 잘 하라는 뼈저린 경고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상인은 제 조언을 잘 들은 젊은 부부의 안색이 나쁘자, 너무 겁을 준 것 같아 미안하다며 머쓱해했다. 터번을 다시 두른 그는 따뜻한 차에 버터와 소금을 녹여 두 사람에게 건넸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어 차를 받은 터헤레와 아르슬란은 눈치를 보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조금은 걱정이 되어서, 또 한편으로는 신경이 쓰여서 쳐다봤는데 그것만으로도 죽을 수 있다는 게 소름끼쳤다. 하기사, 첫 만남에 대뜸 아르슬란의 목을 자르고 터헤레를 끌고가겠다 말하던 남자였다. 눈 한번 잘못 마주쳤다는 이유로 총을 쏘는 일쯤은 아무렇지 않게 여길 것 같았다.
불안과 두려움, 긴장이 찻물과 함께 식어가며 해도 함께 기울었다. 상인들이 모여 불침번 순서를 정하고 하나 둘 잠들 돌아가며 잠들 준비를 시작했다. 터헤레와 아르슬란은 더 이상 그 자리에 뻘쭘하게 앉아있을 수 없었기에 눈치껏 바르드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섣불리 깨우려다가 총이라도 맞으면 어떻게하나 싶어 머뭇거렸다. 제 아무리 안하무인인 터헤레라도 목숨만큼은 소중했기에 남편이 함부로 그에게 다가가지 않도록 손과 팔을 꽉 잡고 버텼다.
다행스럽게도 바르드는 스스로 눈을 떴다. 두 사람의 인기척이 코앞이나 다름없는 거리에서 기웃거리니 신경에 거슬렸다. 저편에 기울어 지평선 아래로 사라져가는 태양과 분주해보이는 상인들만 보더라도 밤이 가까워졌음을 알 수 있었다. 왠지 모르게 흠칫거리며 눈치를 보는 젊은 부부를 이상하다는 듯 본 바르드는 굳은 몸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은 평화로웠다. 기본적으로 사람이 많기도 했고 보초를 서는 상인들도 이런 식의 노숙에 익숙하다보니 긴장감이 없었다. 바르드는 가끔씩 하품을 하거나 몸을 푸는 것으로 잠을 쫓아내면서 시간을 보냈다. 해도 달도 없이 가장 어두운 때에도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말의 재채기 소리에 터헤레가 자다말고 깜짝 놀라 깨어난 게 가장 소란스러울 지경이었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야영에 쓴 짐을 정리하는 건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수가 적은 덕분에 출발할 준비를 금세 끝낸 바르드 일행은 상인들에게 행운을 빌며 야영지를 떠났다. 평소와 달리 잠시만 걸어도 피곤하니 마니 투덜거리던 터헤레가 조용했고 아르슬란 또한 묘하게 가라앉아있었지만 바르드는 둘의 기분까지 신경 쓸 입장이 아니었다. 오히려 쓸데없이 기력을 빼지 않아 산을 가로지르는 속도가 예상보다 빨랐다.
이정도면 산에서 내려가도 조금 더 움직일 여유가 있겠다 싶은 그 순간. 바르드의 예리한 눈이 벼락처럼 깎아지르는 터를 발견하고 기계처럼 멈췄다. 그가 멈추자 뒤따라오던 두 사람과 말이 함께 멈추며 주춤거렸다.
“갑자기 왜 멈추는…….”
“엎드려!”
벼락같은 바르드의 외침에 아르슬란은 반사적으로 아내를 품에 안은 채 엎드렸다. 저 멀찍이서 들려오는 낯선 총성에 놀란 짐말이 펄쩍 뛰었다. 다른 말들도 다함께 동요하며 발을 굴렀다. 바르드는 순식간에 등에 메고 있던 총을 들어 산등성이 위에 숨어있던 상대를 쏴맞췄다. 커다란 격발 소리와 함께 악! 하는 비명소리가 산울림처럼 터졌다. 바르드는 총을 재빠르게 장전한 뒤, 말들의 엉덩이를 쳐 내달리게 만들었다. 겁 먹은 말들과 붙어있겠다는 건 말굽에 밟혀 죽겠다는 뜻이었기에 망설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바르드의 애마, 요드락이 제일 먼저 울며 내달리자 다른 말들이 그 뒤를 따라 산길을 달렸다. 말이 이런 좁은 길에서 달리면 절벽에 떨어질 수도 있었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었다. 장전을 마친 바르드는 잠시 정신이 팔린 산적 중 하나를 더 쏴맞췄다. 조급하게 쏜 탓에 어깨에 맞췄건만, 끄아악! 소리를 내던 놈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저 협곡 아래로 떨어져버렸다. 까마득한 아래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가 끔찍하게 울려퍼졌다. 사람이 죽는 소리에 사지가 얼어붙을법도 하건만 바르드는 눈꺼풀조차 깜박이지 않았다.
다시 총을 장전하던 바르드는 상대가 촌 쏭이 발치에 박히는 것을 보고 이를 드러냈다. 장전을 마치자마자 놈의 미간에 구멍을 내려 했지만, 경사를 순식간에 타고 내려온 산적들로 인해 시야를 방해받았다. 한 놈은 바르드의 앞에 섰고 다른 한 놈은 뒤에 웅크려 있는 터헤레 부부를 노렸다. 이미 손이 부족한 바르드는 아르슬란을 호통치듯 불렀다. 자신이 빌려준 칼을 쓸 때였지만, 제 아내와 함께 웅크린 아르슬란은 겁에 질려 얼어붙었는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썩을. 차라리 어디 숨거나 도망 갈 것이지, 도움이 쥐톨만큼도 되지 않는 어린 부부에 욕지기가 절로 나왔다. 바르드의 정면에 선 산적은 핏발 선 눈을 부라리며 칼을 휘둘러왔다. 거의 불곰이나 다름없는 덩치를 가진 산적이 휘두르는 칼을 좁은 길 위에서 피하려니 여력이 없었다. 형제들을 죽이다니 가만두지 않겠다며 떠들어대는 소리에 바르드는 어이가 없었다. 산적 일이나 하는 버러지가 복수를 부르짖을 입장이기는 했던가. 잘은 모르겠지만 기개만큼은 있었다.
바르드는 빠르게 총신을 휘둘러 목을 노리는 칼을 막았다. 칼을 정면에서 강하게 받아내면 총신이 휘어 격발이 어려울 수도 있었다. 칼날이 빗겨나가 어깨를 베었지만 개의치않았다. 놈이 칼을 다시 휘두르려 할 때, 바르드는 놈의 벌어진 고간을 힘껏 걷어찼다. 하루종일 말을 타고 다니는 사내의 각력은 타인의 골반을 으깰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경험해볼 일이 없는 고통에 산적이 사타구니를 쥐고 웅크리자 바르드는 망설임없이 품 속의 칼을 꺼내 놈의 목과 쇄골 틈을 찍어내리듯이 찔렀다. 손잡이 장식까지 파고들어갈 정도로 깊숙히 박힌 칼을 비틀어 고정한 바르드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놈을 몸으로 밀어 길 바깥으로 넘겨버렸다.
두 번째 낙사자가 생기는 사이, 바르드는 산적이 떨어트린 칼을 주워 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몸을 돌리면서 아슬아슬하게 이마를 스친 총탄이 간담을 서늘하게 했지만 멈출 틈이 없었다. 아르슬란은 죽어도 문제없다 치지만 터헤레가 죽는다면 일이 귀찮아…….
“어디 감히 내 남편한테…! 이 썅놈이!”
“끄으아아악!!!”
“허.”
바르드는 염려와 다른 결과에 헛숨을 토해냈다. 그가 빌려준 칼은 아르슬란이 아닌 터헤레의 손에 들린 채 산적의 배를 힘차게 쑤시고 있었다. 남자를 자기 손으로 자빠트린 여자의 기개는 남편을 위협하는 적을 손수 죽일 정도로 강인했던 모양이다. 산적은 제 배에 어설프게 칼을 쑤신 여자를 시뻘개진 눈으로 내려보며 씩씩거렸다. 아직 쥐고있던 칼로 터헤레를 찌르려던 놈은 바르드가 던진 칼이 등에 깊숙히 박히자 끄르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이제 남은 놈은 하나였다. 동료가 다 죽은 것을 본 잔당은 허둥지둥 총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욕을 뱉으며 도망치려는 것을 돌아본 바르드는 총을 조용히 들어올려 조준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어설픈 후환을 남기지 말라는 족장의 말을 훌륭히 수행하려면 뒷마무리가 필수였다. 바르드는 일부러 놈의 배를 노려 쏘았다.
“아악!”
허리 주변에 피륙이 튄 것을 확인한 바르드는 총을 한발 더 장전한 뒤, 터헤레와 아르슬란에게 다가갔다. 아르슬란은 터헤레를 감싸려다 산적에게 화풀이로 얻어맞은 상태였고 터헤레는 어설프게 칼을 찌르다 손이 베인 상태였다. 두 사람 다 부상을 입긴 했지만 중상은 아니었다. 바르드는 쓰러져있는 놈의 몸을 발로 밟은 채 제가 던졌던 산적의 칼을 뽑아들었다. 날 관리를 하지 않았는지 이가 듬성듬성 빠져있지만 크게 문제는 없었다. 바르드는 아직까지 옅은 숨을 헐떡이고 있던 산적의 목을 단번에 내려쳐 숨통을 끊어주었다.
“아직 살아있는 놈이 있다. 위험할 수 있으니 여기서 기다려.”
“다… 죽일거에요?”
바르드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터헤레가 무슨 의미에서 묻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 놈들을 살려둘 이유가 있나?”
질문을 던지는 와중에 목이 잘린 시체를 길 밖으로 굴리는 바르드는 산적보다도 더 산적같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제 안전한건가 해서…….”
“투카이까지는 안심할 수 없으니 마음 놓지 마라.”
냉정하게 대꾸한 바르드가 가까운 비탈길을 타고 올라가버리자 터헤레는 말 없이 제 손을 내려보았다. 남편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생각에 정신없이 저지르고 말았지만 사람을 찔렀다. 숨을 끊은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분명히 살의를 품은 행동이었다. 칼에 베여 따끔거리는 손을 말 없이 꾹 쥐고 있자, 아르슬란이 엉망으로 얻어맞은 몸을 비틀거리며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당신 잘못이 아니야.”
“…….”
“나는 끝까지 용기를 내지 못했지만, 당신은 해낸거잖아. 자랑스러워해도 돼, 터헤레.”
터헤레는 남편의 다독임에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 파고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산비탈 너머에서 바르드를 만난 마지막 산적의 비명소리가 들렸으나,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불행한 자의 결말을 신경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