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글의 주인공 및 주역은 마비노기 세계관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캐릭터(OC)입니다.
캐릭터의 설정, 관계 도용은 허가하지 않습니다.
캐릭터 설정은 실제 게임의 설정 혹은 플레이와 상이합니다.
이로 인하여 마비노기 설정과 충돌할 수 있으나, 설정오류 지적은 정중히 사양합니다.
마비노기 메인스트림 및 세계관 스포일러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실제 인물, 단체, 지역, 종교, 문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Philein & Logan
write by. UNUS
로간은 비구름으로 어두운 하늘을 올려보았다. 이맘때의 비바람은 다른 때보다 더 차갑고 서늘했다. 언젠가 “삼하인의 날씨를 생각하면 비가 헤일스톰의 얼음발 같아도 이상하지 않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숨을 쉬듯 당연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간은 겨울의 비가 조금이라도 따뜻하기를 바랐다.
로간의 연인은 겨울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얼어붙은 탓에 봄을 맞이하는 법을 잃어버린 고요한 존재. 로간은 그를 처음 봤던 때를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압도적인 존재감과 힘이 느껴지는 건장한 몸에 비해 모든 것이 지긋지긋하다는 듯한 눈빛이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뜻 모를 못마땅함과 불편함에 일그러진 눈매는 로간을 포함한 모든 견습 기사들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기가 눌린 것이 자존심 상한 탓일까, 당시의 디이와 아이르리스는 허세를 부렸다. ‘검증도 되지 않은 사람을 조장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은 어린아이의 투정에 불과했다. 기사 중의 기사라는 톨비쉬가 호의를 숨기지 않고 최연소로 알반 기사단의 정식 기사가 된 알터가 마음 깊이 존경하는 사람이 특별조의 조장으로 임명된 상황이었다. 고작 견습 기사들의 조장이라고는 하나, 그토록 비밀에 철저한 기사단에서 검증 하나 거치지 않은 인물을 앉힐 리 없었다.
로간이 낯선 조장의 첫 견습 기사가 된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별다른 이유와 설명이 없는 선택이었더라도 상관없었다. 그의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자신을 마주하고 손끝이 저를 가리킨 것 만으로도 번개를 맞은 듯한 짜릿함이 느껴졌다. 선택받았다. 그 단순한 결과가 주는 벅차는 기쁨과 떨림은 제 생에 처음이었다.
기대받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억지로 떠맡은 자리에 책임감까지 바라는건 어리석은 짓이다. 때문에 로간은 평소보다도 더욱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자신을 선택한 것이 쓸모없는 일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었다. 언젠가는 알아봐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로간의 시선은 항상 그를 좇았다. 로간의 마음은 항상 그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렇기에 언제라고 할 것도 없이 로간의 마음속에 그가 홀로 서 있었다.
“나의… 나만의 조장님.”
사랑이라는 것은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이다. 이해받을 수 없는 계기에서부터 시작된 감정은 부지불식간에 사람을 휩쓸어버린다. 로간의 사랑은 부서지는 폭포 아래에서 북받치는 감정을 홀로 억누르던 이의 등을 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의 굳건했던 몸은 버려진 아이처럼 떨리고 있었다. 끅, 끅, 억눌린 숨소리는 거대한 폭포 소리 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로간은 온 세상에 홀로 버려진 듯한 그 모습을 도저히 혼자 둘 수 없었다.
둑이 터지듯 우는 몸을 안아주었다. 긴장으로 굳은 등을 조용히 다독였다. 제 온기가 그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랐다. 북받쳐 터져나오는 울음소리가 고통스럽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저 아프지 않기를. 조금이라도 행복하기를. 자신을 알아주지 않더라도 그저… 그저 조금이라도…….
로간은 울고 싶은 기분을 매 순간 참아내야만 했다. 짝사랑이라는 건 알아주기를 바라면서도 모르기를 바라는 모순적인 감정을 형벌처럼 견뎌내야 하는 죄였다. 로간에게 허락된 건 한 번이라도 더 그의 간절함을 바라보는 것 뿐이었다. 어쩌면 그 눈에 애절함이 너무 많이 담겼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너무 갈구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차라리 제 감정을 들켜 거절당하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다.
사실은 함께 행복하고 싶었다. 인정받고 싶었다. 짝사랑만으로, 혼자만의 마음으로 끝나길 바라지 않았다. 세상의 그 누가 홀로 끝나는 사랑을 원한단 말인가. 세상 어느 누가 그런 슬픈 결말을 원한단 말인가.
“로간.”
차분한 목소리가 겨울을 갈랐다. 로간은 조심스럽게 제 손을 감싸 잡아주는 손길을 느끼고 상념에서 벗어나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하늘보다도 짙은 감색(紺色)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 아래에 온기와 염려가 가득한 눈빛에 자신의 모습이 비쳐보였다.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괜찮습니까?”
연인의 걱정 어린 질문이 로간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흐리고 어두웠던 로간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크림색의 곱슬거리는 머리칼이 연인의 어깨에 기대어 눌렸다. 무겁지도 않은지 가만히 받아주는 몸에 기대어, 로간은 작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그냥… 조금, 생각이 깊어져서…….”
“…….”
필레인은 로간의 대답에 무어라 말해야할지 몰라 입 안을 강하게 물었다. 그의 연인은 속이 깊은 사람이다. 속이 깊다는 건 스스로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무슨 일을 겪고 어떤 생각을 하건 꿋꿋이 홀로 견뎌내는 로간의 모습을 볼 때 마다, 필레인은 제 심장 한켠이 도려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필레인에게 로간의 마음은 언제나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훤히 비쳐보여지던 것이었다. 그의 온기 어린 갈색 눈동자만 마주봐도 연인이 원하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로간의 사랑을 눈치챌 수 있었고 그를 사랑할 수 있었다. 필레인은 그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를 정도로 어리석거나 멍청하지 않았다. 그의 긴 긴 생에 짧게 스쳐지나갈 온기라 할지라도 로간을 소중히 해야한다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막막할 정도로 다르다. 그 둘은 언제나 달랐다. 필레인은 로간을 소중히 할지언정 스스로에게는 그러하지 못했다. 그가 연인을 사랑하는 만큼 연인 또한 그를 사랑하고 염려하고 아낀다는 당연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필레인은 자해와 같은 자멸적인 행동으로 그의 연인을 상처입혔다. 더욱 최악인 점은 스스로의 행동에 로간이 상처받고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멈추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왜 멈추지 못했을까.’ 는 의미없는 질문이다.
‘왜 모르는 척 했는가.’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질문에 가슴 한켠이 선득해졌다.
“…많이 힘듭니까?”
“예?”
로간은 잠시 어리둥절한 눈으로 필레인을 올려보았다. 이내 미미하게 찌푸려진 그의 눈매와 답지 않게 움츠린 어깨를 보고서야 로간은 질문의 의미를 깨달았다. 로간은 자신의 연인이 얼마나 겁이 많은 사람인지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의식하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짓고있다 한 들, 로간의 눈에는 그가 품은 두려움이 선명히 읽혔다.
“그런 게 아닙니다. 필린, 걱정하고 계신 그런 게 아니에요.”
“하지만…….”
“그냥, 제가 당신을 사랑하기 시작했던 것이 짝사랑으로 끝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당신에게 감정을 들켰을 때에는 어떻게든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제가 당신을 좋아하는 것 마저 거부당하는 건 두려웠으니까요.”
필레인은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당시의 필레인은 로간의 마음을 불편하게 여겼다. 실제로 로간을 단념시킬 생각도 하고 있었다. 자신처럼 어그러진 사람이 아닌, 평범하고 선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로간에게 더 좋을것이라 일방적으로 단정지었다. 필레인은 과거의 자신이 얼마나 무례한인지를 기억하게 되자 속이 쓰렸다.
“지금도 제게 거부당할까 두렵습니까?”
“아니요.”
로간은 선선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의 여유에 담긴 것은 뿌리가 단단한 사랑이었다. 필레인은 로간의 목소리에 스민 온기에 옅게 미소지었다. 필레인의 손이 다정한 연인의 눈가에 입맞추고 다부진 허리를 끌어안았다. 단단한 몸들이 바짝 붙었지만 두 사람 다 불편함이라고는 느끼지 않았다. 삼하인의 서늘한 바람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따스한 온기만이 주변을 맴돌았다.
로간이 준비한 야영용 텐트는 그리 작지 않았다. 네 명은 족히 들어앉을 수 있는 크기임에도 필레인과 로간이 함께 들어서자 왠지 내부가 좁게 느껴졌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좁은 공간에 투덜거릴 만큼 철이 없지 않았다. 서로 익숙하게 자리를 잡고 짐과 옷을 정리하며 저녁을 준비했다. 어지간한 요리라면 못할 것이 없는 두 사람이었기에 식사와 정리에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잠자리를 준비하던 필레인은 텐트 바깥에서 들리는 빗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주 적게 툭툭거리던 소리는 이내 텐트 전체를 두드리고 그 주변을 휩쓸듯한 소리를 냈다. 전부터 비가 올 듯 말 듯 하더니 때가 된 것인지 쉴 틈 없이 쏟아붓기 시작한다. 잠시 캠프 밖을 살피듯하던 필레인은 벗고 있었던 로브를 둘러썼다.
“필린, 갑자기 로브는 왜…”
“물이 캠프 안으로 고일지도 모르니 배수로를 파야겠습니다.”
“그런 거라면 저도 하겠습니다. 혼자 하는 것 보다야 둘이서 하는 게 빠를겁니다.”
필레인은 로간을 말리지 않았다. 마음같아서는 말리고 싶으나, 마냥 위한답시고 상대를 천치로 만드는 짓은 그만두어야했다. 필레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나가자 로간은 지체없이 로브를 챙겨 입었다. 삽으로 땅을 푹푹 파내고 있던 필레인을 따라 익숙한 듯 막일을 시작하는 로간의 로브는 금세 진흙과 빗물로 푹 젖어들었다.
체격과 힘 좋은 두 사람이 손발 맞추어 일한 덕분일까. 배수로는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빗물이 잘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한 필레인은 이마가 땀에 푹 젖은 채 숨을 몰아쉬는 로간을 돌아보았다. 고작 비오는 날 땅이나 조금 파낸 것 뿐인데도 함께 일했다는 것이 뿌듯하기라도 한 듯, 로간의 표정이 밝았다. 필레인은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을 느끼며 로간에게로 다가갔다.
“이제 됐습니다.”
로간은 흙 묻지 않은 손등으로 이마를 닦다가 고개를 들었다. 필레인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강아지의 그것처럼 선명하게 반짝거렸다. 마치 비오는 날 신나게 산책을 하고 돌아온 것 같은 활달함이 느껴졌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간지러움이 커졌다. 필레인은 자신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로간은 정말 오래간만에 본 연인의 진짜 웃음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머리를 덮은 후드 밑으로 젖어 흐트러진 머리칼과 환하게 웃는 필레인의 모습이 아로 박혔다.
삼하인의 빗속에서 웃는 연인을 바라본 로간은 필레인의 모습이 숨막힐 정도로 환하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코가 시큰하고 입안이 아렸다. 살이 얼 정도로 추운 겨울에 내리는 빗속에서 처음으로 따뜻함을 느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마치 필레인에게 처음으로 선택받았을 때 처럼, 그 때와 같은 두근거림이 갈비뼈 안을 긁었다.
필레인은 그런 로간의 손을 잡았다. ‘더 있다가는 감기에 걸릴겁니다.’ 갑자기 웃은 것이 민망한 듯 애써 침착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목소리에 웃음기 어린 잔떨림이 느껴졌다. 두 사람이 텐트 안으로 들어가 젖은 로브와 신발따위를 벗어 정리하는 동안, 로간은 제가 봤던 것을 다시금 떠올려보았다. 시리던 겨울비 속에서 진흙 묻은 로브 차림으로 웃어보이던 자신의 연인. 그 희고 창백한 빛깔이 어색할 정도로 환한 웃음이 환상같았다.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언젠가 갑작스럽게 날을 세우고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 때마다 로간은 필레인을 원망할수도 있고 미워할수도 있다. 사랑이라는 건 만능이 아니어서 불쑥불쑥 행복을 송곳처럼 찌르는 아픔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연인이 자신을 보고 허물없이 웃어준다면, 그 미소를 두 눈에 담을 수 있다면… 로간은 상처를 천천히 잊게 될 터다. 오래된 상처에 새살이 돋고 흉터가 아물듯, 언젠가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떠올리고 잊어버릴 정도로 담담해질 것이다.